순천시의회 최미희 의원 인터뷰

단 돈 5만원을 쥐고 무작정 순천으로 왔다. 연고도 없어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평범한 일상을 바랐던 부모의 간절함까지도 내쳤으니 과연 속내가 궁금하다.

목포에서 나고 자란 순천시의회 최미희의원은 “순천은 노동자들이 많아 이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무언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며 “사회적 약자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지금껏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당에서 일한 것도 노동자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정책이 곧 그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진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난 14년 지방 선거때였다. 통합진보당으로 시의원에 출마한 나를 빨갱이라며 경로당 서너군 데서 출입을 못하게 하더라”라며 “아직도 우리 사회가 보수니 진보니 하는 해묵은 이념논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최의원은 일벌레다. 스케쥴 표에는 일정이 빼곡하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고 밤 9시 전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곳으로 온 지 두 달만에 이수전자 노동조합 위원장까지 맡을 정도니 그의 추진력과 성실함은 이미 도드라졌다.

지난 2010년에 순천시의회에 입성한 후 연거푸 두 번이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을 때,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본 다른 당에서 꾸준한 구애를 받았다고 그는 실토했다. “그러나 뜻을 같이 하는 옆 동지들이 눈 앞에 아른거려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덧붙인다.

최의원은 전남대 철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우연히 외할아버지의 과거사를 알고 나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해방 이후 건준위 활동을 하던 중 51년에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됐으나 3년간 복역 후 교도소측이 출소했다고 한 외조부가 행방불명됐다”고 말한 최의원은 “당시에 출소자들을 집단 처형했다는 소문이 난무했었던 점을 들어 아마 그 때 돌아가셨을 걸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이에 “수업을 거의 빼먹고 학생운동에 몰입한 딸이 걱정스러운 나머지 어머니는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1톤 트럭으로 자취방 짐을 싸그리 싣고 내려갔다”고 그는 회고했다. 항상 죄스런 마음이었는데 지난 설에 의원이 된 자신을 자랑스럽다고 부모님이 말해 줘 기뻤다고 한다.

최의원은 지난 24일에 순천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을 졸업했다. 복지정책을 구현하는 데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해서다. 구체적 해결책을 찾을려고 하는 그의 성격답다.

최의원의 인생에 있어서 화룡점정은 통일정책이다. “앞으로는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싶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 사회구조를 바꾸는 계기는 바로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성호 이익같은 실학자들은 당시에는 비판받고 거부 당했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땐 어마어마한 개혁사상이었다.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춤추면서 일하겠다”는 최의원에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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