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관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장
임승관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장

김순호 경찰국장의 프락치 의혹 기사를 보고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프락치로 유혹 당한 일과 내게 정보원임을 고백하던 J.

 

1997년 만 19살 여름. 학생운동으로 경찰에 쫓기던 3개월 중 어느 날. 부친의 지인이 경찰정보원으로 이름을 올리면 처벌받지 않는다. 네가 원하면 연락해라.” 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른바 프락치 작업. 집 앞엔 경찰이 상주했고 학교도 갈 수 없어 친척집을 전전했다. 막연함과 초조함, 배고픔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청춘의 혈기는 이런 제안이 오히려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결국엔 경찰의 조사 후 기소되어 법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와중에 지금도 선명한 2가지 토막이야기가 있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중 경찰관이 시위 중 찍은 사진첩을 펼치며 아는 이의 이름을 적으라 했다. ‘모른다고 시치미 떼면 한 대 맞는 거 아닌가라는 얄팍하지만 진정 어린 근심으로 사진첩을 보는데 앞서 취조당한 학생들의 자취를 보니 뭉클하고 아렸다. 사진 속 얼굴에 선을 그어 이름을 적어놨는데 학생 대표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얼굴에 가명을 남겨 둔 것이다. 앞선 이들의 노력에 동참해 적혀진 이름 말고는 몰라요했는데 다행히 큰 강요 없이 지나갔다. 나는 사건이 종결되는 시점이어서 취조가 덜했지만, 앞선 학생들에겐 얼마나 많은 폭력과 협박, 회유가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양심을 팔지 않은 그들이 있었다.

다음 토막은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 복무 중 재판을 받던 시기의 이야기다. 법원에서 그날 처음 본 국선변호사가 나를 변호했다. “피고인은 전라도 순천시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며 성장했습니다.” 당연히 나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항변했고 비웃는 재판장과 어이없다는 변호사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2003년 순천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절 경찰의 두 번째 유혹이 있었다. 학생회의 대표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이 출석요구를 보내왔는데 이를 거부해 출국금지에 수배 중이었다. 그해 초여름의 어느 날 부친의 지인이라며 한 경찰관이 학생회관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부모 생각해 자수해라. 처벌받지 않게 하겠다. 네가 때를 맞춰 학교 밖으로 혼자 나오면 우리가 잠복해 연행하는 방식으로 해주겠다. 전에도 사례가 있고 아무도 모르게 할테니 걱정마라.”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그날 유혹에 빠져 타협했다면 지금까지도 경찰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나야 문민정부 시절 이후라 순한 맛이었지만 얼마나 많이 이들이 고문과 협박으로 회유를 받아왔을까? 그럼에도 동지의 이름을 팔지 않고 양심을 지킨 이들이 있었기에 대통령을 제 손으로 뽑고 때론 탄핵할 수 있는 성숙한 민주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로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엔 같이 학생운동을 하던 J와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J는 정보원 활동을 한 과거를 얘기하며 괴로워했다. 부끄럽고 무거운 짐을 내리려 한 고백이었겠지만 나는 받아 안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믿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그날을 지워버렸다. J는 졸업 후 시민운동 언저리에 머물다 조용히 사라졌고 지금은 지역의 모 정치인에 붙어 있다.

민주화와 진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러져 갔던가? 이들이 바라던 역사의 전진에 반해 동지들을 팔아가며 독재자와 기득권에 기생했던 김순호와 J에게. 앞에 나서지 말고 적당히 밥벌이만 하며 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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