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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보장된 임신 중지에 대한 연방헌법 상의 권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인해 미국에서 임신 중지 권리 보장은 주 정부 및 의회의 권한이 되었다. 26개 주에서 임신 중지를 금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판결이다.

해리스 미 부통령은 그동안 연방 차원의 임신 중지 권리를 입법화하지 않았던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그동안 이 이슈가 해결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슬픈 시대,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후, 2020년 12월 31일까지 관련 법을 입법 개선하라고 정한 바 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임신 중지와 관련된 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임신 중지에 관련된 어떤 기준도 마련되지 않아 임신 중지와 관련된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기 어렵다.

임신 중지에 대한 찬반은 태아 생명 보호와 여성의 자기 결정권 문제로 갈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권한에 대한 찬반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임신 중지는 선택적으로 ‘허락’된다.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장애나 질병이 있는 등의 경우는 합법적으로 임신 중지가 가능하다. 또한 과거 우리나라는 산아 제한 정책을 실시하며 국가 주도 임신 중지가 음성적으로 행해졌다. 공권력이 여성의 몸을 지속적으로 통제해 온 것이다. 태아 성감별로 여아 낙태가 이루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선택과 건강이 결정의 우선순위인 경우는 거의 없다.

국가 주도 인구 계획에서 여성의 건강은 무시 된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에서는 출산율 증가를 목표로 낙태금지법이 시행되었고 낙태금지법의 부작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출산으로 인해 시설에 맡겨지는 아이의 수가 늘고 유아사망률이 높아졌다. 불법적이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수술 등으로 모성사망비가 증가하고 합병증과 후유증도 늘었다. 출산율은 잠시 높아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법 시행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산아 제한을 한 중국의 경우에는 강제적 단산 시술과 낙태가 시행되었다. 여성의 몸을 재생산 도구로만 본 결과이다.

임신, 출산과 마찬가지로 임신 중지가 여성의 신체 및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러므로 그와 관련한 모든 결정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존중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임신 중지 합법화는 임신 중지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출생률을 높이고, 임신 중지를 줄이는 것은 임신 중지를 법으로 막는 데 있지 않다. 원하는 임신을 할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 사회, 아이를 낳아 기르기 편안한 사회, 아이와 양육자가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게 보호되는 사회일 때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제정될 임신 중지 관련 법은 임신 주체인 여성의 건강과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슬픈 시대’를 끝낼 수 있는 법이 되길 바란다.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젠더와 건강의 정치경제학(레슬리 도열 저, 한울아카데미)

*함께 봤으면 하는 영화: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2018, 넷플릭스)

이경숙 한약사
이경숙 한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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