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떤 젊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예산 도둑질과 세월호 사고의 진실이 안 밝혀지는 문제를 들면서 “이러다가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즘 젊은 사람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거 관심 없어요. 망해봤자 이보다 더 나쁘겠어요? 차라리 망하라 하죠 뭐.”

국악 명인 이광수가 부르는 비나리라는 노래에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집안의 어린 아이들에게 축복을 해주면서, 나라에 충신이 되고 부모에 효자가 되기를 기도해 주는 겁니다. 이 가사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부모은중경이 조선 시대 때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되면서 생겨난 가사입니다.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라는 가사는 비나리뿐 아니라 자장가 가사로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장례 지낼 때 무덤을 다지면서 부르는 달구소리에도 가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윤리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충성이란 어떤 윤리일까요? 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충성일까요? 충성은 사회 전체의 공공선에 대한 윤리이고, 효도는 개인 관계에 대한 윤리입니다. 즉, “사회 전체, 민중 전체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시스템, 정치 시스템, 경제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라”라는 것이 바로 충이라는 윤리의 핵심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충신이 되고자 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왕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리고 궁궐 앞에서 읍소도 했던 겁니다. 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충성이라면 왕을 비판하는 상소는 결코 올릴 수가 없을 겁니다.

조중동과 KBS, MBC는 끊임 없이 우리에게 정치에는 관심 끄라고 주장합니다.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것이며, 공적인 일은 시스템이 알아서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이 바로 간신배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너희들은 효도만 하라, 충성은 우리만 하겠다”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 노래를 보십시요.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는 양반들뿐만 아니라 모든 서민들에게도 가르쳤던 보편적인 윤리 기준이었습니다. “너희는 공적인 일에 관심 끄라”는 간신배들의 이야기가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시스템은 결코 시스템 스스로 잘 굴러갈 수 없습니다. 그 시스템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끊임 없이 감시해야만 시스템이 제대로 관리될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 38장에는 失義而後禮(실의이후예)”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예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저도 이렇게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윤리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은 우리 사회에 진실도, 정의도 점점 찾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땅은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발 붙이고 살아야 할 곳입니다. 그러니, 정의가 사라진 이 땅을 다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무엇이 윤리적인 행동인가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라는 쉬운 노랫말로 보편적 윤리 교육을 했던 우리 조상님들의 깊은 뜻을 다시 헤아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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