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면서 인간이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참 무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역으로 ‘나’의 미숙함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겠지요. 또한 그 말은 ‘나’의 미숙함, 그 속에 무궁함이 깃들어 있다는 말도 되겠네요. 오늘 출근길에 보니 낮게 자란 풀들이 더 높은 하늘을 보고 있더군요.’

얼마 전에 내가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카페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올리기 전에 나는 저녁산책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길을 걷다보면 마주치기 십상인 고즈넉한 시간이 나를 찾아왔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어디쯤에선가 문득 진저리쳐질 만큼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혐오와 경멸, 이런 부정적인 언어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향해지는 끔찍한 형벌의 시간이었다.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에서 돌아와 평화를 되찾은 것은 불과 몇 초 뒤였다. 마음의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불과 몇 초라니? 아마도 그것은 나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탓일 수도 있겠지만, 이때의 가벼움은 민첩함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랬다. 나는 아주 민첩하게 프란치스코 교황을 나의 산책길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교황님도 처음에는 저처럼 미숙한 인간이었겠지요?”
“지금도 그렇다오.”
“그럼 저도 교황님처럼 아름다운 인간이 될 수 있겠군요.”
“지금도 아름답다오.”

이런 대화 끝에 떠오른 것은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교에는 순수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는 조금 못한,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아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이미 아름다운 존재라면 그들의 미숙함 속에 어떤 완전함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날 산책길에서 교황과 나눈 대화는, 그것이 나의 동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해도, 내 안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을 가진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철없이 보이는 아이들이라도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무궁한 존재라는 것을.  

몇 해 전 일이다. 그날도 저녁 무렵 방천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졸업한 제자아이들을 만났다. 나를 많이 힘들게 했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반가웠으리라. 우린 서로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다가 근처 벤치에 앉았다. 한참을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산책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위험하다고 한사코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다. 그래도 기어이 걸어가겠다고 하자 한 아이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를 누르시면 돼요. 그럼 최근에 통화한 사람과 연결이 돼요. 제가 방금 선생님께 전화를 했으니까 제가 받을 수 있어요.”

말하자면 전화를 받고 나를 구하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처녀애들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나를 걱정하며 바라보던 그들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눈빛은 오래 전에 그들을 걱정하며 바라보았던 나의 눈빛을 그대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주체가 뒤바뀐 순간 그들은 완전했고, 나는 그들의 사랑에 압도당한 어린아이만 같았다.

이번 교황의 방문이 내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나와 무관하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의 인간답지 못함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그것을 위대한 아이들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수업시간이었다. 교황의 방문이 우리에게 준 교훈에 대해서 짧게 정리해준 뒤에 학생들의 의견을 청취할 생각이었다. 한 아이가 다짜고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교황님이 우리나라 대통령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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