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후 전 제주 4·3연구소 소장
김창후 전 제주 4·3연구소 소장

2021년 7월 20일, 10·19사건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사건 발생 73년 만의 쾌거였습니다. 그러나 1948년 같은 해에 발생했던 제주4‧3이 진상규명을 위해 4·3특별법이 공포된 것이 2000년 1월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간 21년 이상 많은 세월이 흘러 축하를 드리면서도 동시에 적지 않은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많은 분이 10·19특별법을 만들기 위해 고생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주에서는 1989년 문을 연 4·3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와 언론이 처음 고난의 발길을 뗀 4년 후 도의회가 참여하며 진상규명운동이 질적으로 향상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12월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4·3특별법이 제정됐다는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곧 4·3특별법 시행령이 개악되면서 저지투쟁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제는 유족들이 전면에 나섭니다. 발을 묶던 족쇄가 풀린 것이었겠지요. 여수·순천도 비슷할 겁니다.

이제 축하의 말은 묻고, 저희 경험에 비춰 우려되는 일부터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일 큰 걱정은 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면서 사건 경험자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사건에 관련된 군·경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보니 어르신들의 증언이 사건 진상규명에 절대적입니다. 하루바삐 더 많은 어르신을 봬야할 겁니다. 조사며 진상조사보고서 발간까지 모두 2년 6개월, 이것도 4·3의 경우 3년보다 짧아 걱정됩니다. 군·경자료를 비롯한 국가기록을 최대한 많이 발굴해내야 합니다. 가해자 조사도 필요합니다. 다행히 4·3특별법에는 없는 직권조사, 동행명령, 자료제출 요구 등의 권한을 잘 이용하면 이외의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4·3틀별법 시행령 개악저지를 위한 범도민궐기대회'에 참여해 제주시내 중심가를 행진하는 4·3유족들과 대표단(제공=김창후)
'4·3틀별법 시행령 개악저지를 위한 범도민궐기대회'에 참여해 제주시내 중심가를 행진하는 4·3유족들과 대표단(제공=김창후)

 

10·19특별법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뗐습니다. 벌써 어려움이 밀려오고 있을 겁니다. 시행령 개악 저지투쟁. 4·3도 시행령 싸움으로 진상규명을 시작했습니다. 관계단체가 시행령 초안을 제출했으나 행자부가 왜곡하면서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중앙위원회며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에 비전문가인 공무원과 군사전문가로 채웠고,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할 전문위원을 비상임 2명으로 격하시켰습니다. 한 마디로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을 정부 입맛에 맞게 하겠다는 속내였습니다. 곧 33개 시민·사회·학생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궐기대회를 열며 공동대응에 나섰습니다. 정부가 이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인 것은 한 달 후였습니다. 이제 10·19가 비슷한 싸움에 비슷한 대응을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얼마 없어 극우단체들의 각종 소송제기가 이어졌습니다. 끝없는 억지주장이었습니다. 그러던 2003년 10월 15일, 정부의 『4‧3 진상조사 보고서』가 최종 확정되고,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에 와 관계단체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 후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한다”라는 공식 정부 입장을 발표합니다. 정말, 제주도민들에겐 4·3 발발 55년 만의 승리였지요.

제주4‧3이 없었으면 여순10·19도 없었을 것이다, 그간 제주와 여수를 오가며 아프게 들었던 말입니다. 지난 1997년인가요, 그때부터 <여수사회연구소>와 <제주4‧3연구소>가 광주, 대만, 오키나와, 오사카 여러 인권단체와 교류하며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연대했지요. 두 지역을 옥죄는 역사의 어둠이 같았고, 두 연구소의 목표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20여 년 두 지역은 앞으로도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연대해 밝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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