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성곽. 한창기는 낙안군수가 되기를 소망했다. 박물관은 2004년 공사 시작, 2005년 조충훈 순천시장 구속, 낙안읍성 주민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2008년 기부 채납하여 순천시립으로 2011년 11월 21일 개관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성곽. 한창기는 낙안군수가 되기를 소망했다. 박물관은 2004년 공사 시작, 2005년 조충훈 순천시장 구속, 낙안읍성 주민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2008년 기부 채납하여 순천시립으로 2011년 11월 21일 개관했다. ⓒ순천광장신문

낙안지역은 1908년까지 순천과 보성 사이에 있던 독립된 군이었다. 낙안군은 순천시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 일부와 보성군 벌교읍,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를 포함하였다. 일제는 동학혁명의 진원지였고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인 낙안군을 없애고 순천, 보성, 고흥으로 쪼개버렸다. 일제의 침탈에 총을 들어 항거하던 정미의병이 일어나던 중이었다.

일제는 벌교를 낙안에서 떼어내 보성으로 편입한 후 전남지역 동남부의 중심포구로 개발했다. 그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유입된 벌교에서는 한일합방 이후 많은 일본인 상점들이 문을 열었다. 벌교장은 전남 3대 시장 중 하나로, 장이 열리면 3,000여 명이 모였다. 벌교는 주변 지역보다 일제의 수탈이 가중되었고 이에 반해 농민들의 소작쟁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등이 매우 활발하였다.

1936년 한창기는 벌교면 고읍리에서 태어났고, 벌교면은 1년 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벌교읍은 낙안지역에 속하고 왕래도 빈번하며, 순천시와 인적·물적 교류가 매우 많다. 벌교 사람들은 2005년 순천시로의 편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벌교인구는 1만 6,623명이었는데, 참여 인원이 1만1,000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벌교와 낙안이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는 낙안군이 순천과 보성 사이에 표시되어있다. 낙안군은 벌교를 비롯해 동쪽 개운산과 서쪽 존재산 등을 경계로 하며, 장도 여자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일제는 전남 동부 항일 운동의 중심이었던 낙안군을 3개 군으로 분할하여 없애버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는 낙안군이 순천과 보성 사이에 표시되어있다. 낙안군은 벌교를 비롯해 동쪽 개운산과 서쪽 존재산 등을 경계로 하며, 장도 여자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일제는 전남 동부 항일 운동의 중심이었던 낙안군을 3개 군으로 분할하여 없애버렸다.

벌교와 낙안은 하나
한창기가 전통 문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민속품을 수집할 때, 동생 한상훈은 고향에 전통문화단지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1979년 벌교읍 징광리에 징광문화단지를 세우고, 옛날식 덖음차 생산을 위해 차나무를 심고 옹기를 굽기 시작했다.
독신이었던 한창기가 지병으로 1997년 작고하자 유물 처리에 관심이 쏠렸다. 지인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고 박물관 내에 '한창기 갤러리'를 만드는 방법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한상훈은 고향에 박물관을 건립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해 한상훈마저 병사하고, 한창기의 수집품은 컨테이너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2003년 한창기의 제수인 차정금 씨는 성북동 집을 팔아 낙안면 남내리와 평촌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 박물관 건립을 추진한다. 2004년에 공사를 시작하지만 자금 사정 등으로 2006년에 사업이 중단되었다. 

당시 조충훈 순천시장이 뿌리깊은나무 재단 측으로부터 5,000만 원을 수뢰한 혐의로 2005년 12월 구속 기소되었고, 이후 추가 예산 확보의 어려움이 주요인이었다. 낙안읍성 주민들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2008년도에 박물관 부지와 시설물을 순천시에 기부 채납하였고, 순천시립으로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2011년 11월 21일 개관했다.

앵보, 한국인의 뿌리를 어르다

 

오염되지 않은 말글 중시

획일 아닌 융합으로

그가 물었다. “새가 날아간다와 새는 날아간다의 차이를 아는가?” 새가 날아간다 새가 날아간다 새가 날아간다, 자꾸 말하니 새가 날아가는 게 보이는 듯하다. 새는 날아간다고 여러 번 읊어보지만 새가 날아가는 그림은 쉬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 차이가 뚜렷하진 않다. 말의 차이를 통해 사람 속에 들어앉은 마음을 살펴보려 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 잡지계의 전설인 〈뿌리깊은나무〉를 만든 사람, 앵보라는 필명을 쓴 한창기다.

〈뿌리깊은나무〉는 제호에서 짐작하듯 순 한글로 가로쓰기를 했고, 글 내용만큼 모양을 중요시하여 디자이너가 참여해 만들었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1976년 창간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 유신체제에서는 여타 잡지의 내용이 정치 경제 분야에 편중되어 있었고, 바른 말 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생활 문화라는 틀 속에 말하고자 하는 뜻을 녹여냈다.

한창기는 한국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고갱이를 끄집어내려 애썼다. 한국 사람의 사유방식은 그 표현 형식인 한글로 정의된다. 그는 한글에서 한국인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사투리는 표준어와 달리 영어와 한자, 일본어에 물들지 않았다. 교양인의 번듯한 ‘글말’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숨어 지내는 민중의 ‘입말’ 속에 뿌리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펴낸 〈민중자서전〉 20권은 사투리를 소리 나는 그대로 채록한 그야말로 언어의 보고다. 마지막 장돌뱅이, 조선 목수, 뱃사공, 춤꾼 등이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풀어냈다. 한국 최초의 구술사다.

이를 통해 민중의 입을 빌어 나온 사투리를 글로 외화하여 한국어를 통일시키려 하였다. 나랏말의 통일이란 ‘교양 있는 서울말’로의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한 사투리들의 융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우리 문화의 뿌리가 튼튼하게 자리 잡고 나이가 우리 것의 진정한 되살림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문화강국’의 소망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실현해내려 애썼다.

세계 구석구석 한국 문화의 발자국이 퍼지는 현재, 그의 첫 발자국은 더욱 선명하게 조명되어야 한다. 당시 군사 문화가 코흘리개의 노랫소리에서부터 텔레비전의 처음과 끝까지 만연하던 때였다. 입만 열면 누구나 나라를 걱정하던 시기였다. 그는 ‘세상의 서기’가 되고 싶어 했다. 소소한 민중의 삶을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외톨박이였다. “다르다고 해서 다 그르지는 않다. 달리 행동하는 사람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이 나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꼽게 여기지 말자. 바로 그 외톨박이가 새로운 내일의 기수일지도 모른다” 1975년 11월 잡지 〈겨울나무〉 속 발행인의 편지에서 말한 그대로 내일의 기수가 되었다.

뿌리깊은박물관에 전시 중인 '월왕전 목판'은 경판 방각소설의 책판으로 유일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부터 시작된 방각본 출판은 영조, 정조 때 활성화되었다. 18~19세기는 한글 고전소설의 시대라 불릴 만큼 유행하였고 서민은 물론 양반을 넘어 임금까지 애독하였으며 일본, 미국까지 퍼지는 등 한글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방각본이란 상인들이 이윤을 목표로 제작하여 판매한 책으로 오락성이 뛰어났다.
뿌리깊은박물관에 전시 중인 '월왕전 목판'은 경판 방각소설의 책판으로 유일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부터 시작된 방각본 출판은 영조, 정조 때 활성화되었다. 18~19세기는 한글 고전소설의 시대라 불릴 만큼 유행하였고 서민은 물론 양반을 넘어 임금까지 애독하였으며 일본, 미국까지 퍼지는 등 한글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방각본이란 상인들이 이윤을 목표로 제작하여 판매한 책으로 오락성이 뛰어났다.
한창기는 청자나 백자 등 값나가는 골동품을 수집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늘 사용한 손때 묻은 유물을 발견하고 모으는 것을 즐겨했다. 그 옛날 곱게 간직했을 법 하지만 이젠 낡고 헤어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모피함에도 장인의 손길이 닿아있음을 발견했다.

 

 

토박이 문화, 깊은 뿌리 여기에

순천시립 뿌리깊은박물관은 지난 21일 개관 1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현재를 살펴보고 앞으로를 내다보는 질문을 던졌다. 김상현 학예연구사의 설명은 길었고 제공한 자료는 정확했다. (편집자 주)

 

1.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의 운영 목표는?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고(故) 한창기 선생님이 생전에 수집한 6,500여점의 토박이 문화유산을 기탁 받아 2011년 11월 21일 개관하였습니다. 박물관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76년 3월에 창간된 잡지 '뿌리깊은나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뿌리깊은나무는 한국문화의 본질을 지배층의 고급문화가 아니라, 토박이 민중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잘살아 보자’로 시작된 개발과 근대화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고 오랫동안 이 땅의 민중의 생활 속에서 영위해왔던 토박이문화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점점 소멸되어 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창기 선생은 토박이 문화유산의 수집과 보존에 노력하였습니다. 아울러 토박이민중의 말인 한글의 가치에 주목하여 당시의 관행을 깨고 순한글,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셨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한창기 선생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의 민중이 남긴 토박이 문화유산을 수집‧보존하고, 토박이말인 한글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운영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단소의 명인이자 중요무형문화재 83호 구례향제줄풍류 예능보유자셨던 고(故) 백경 김무규 선생의 '수오당' 고택이다. 이 한옥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별채 등 여덟 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사대부 주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 아름다움으로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의 무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관람객들에게 개방하여 조상들의 주거문화를 배우는 전통한옥 체험장소이자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2. 위 목표 실현 위한 노력은?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는 토기와 민화를 비롯해, 짚신, 자라병, 등잔대, 절구 등 다양한 민속유물과 한글 고서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은 대부분 어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민중이 일상에서 사용하였던 생활용품들로 ‘익명’이지만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정겨운 유물들입니다. 하나하나에 그 쓰임과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박물관은 이러한 유물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기획전시를 2011년 개관이래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년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말 한글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전시와 때깔 좋은 옛가구전, 민화 ‧ 유기 ‧ 지도 ‧ 복식 등의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또 다양한 학예연구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소장 별춘향전 등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소장유물 보존처리 활동을 통해 조상들의 소중한 역사가 담긴 유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3. 10년 동안 가장 호응이 좋았던 전시는?

박물관은 상설전시와 함께 그때그때의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시의성 있는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함(函) - 담다, 그리고 품다'라는 특별기획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단순히 물건을 담는 수단으로만 치부되었던 함(函) 속에 담긴 조상들의 숨은 지혜와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또 조상들의 옛 그림인 민화를 주제로 한 '한국 민화의 멋'(2014)이라는 전시회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최초로 공개된 8폭의 병풍 책가도는 그 아름다움으로 관람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4. 유물은 몇 점이며 어떻게 관리하나?

박물관은 현재 6,500여 점의 소장유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소장유물은 고서‧서화, 유기, 목기, 복식, 도기‧석기, 토기, 석물, 한창기유품 등 크게 8가지로 분류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사람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각각의 유물카드를 작성하여 유물의 내용과 가치에 대한 상세내역을 비롯해 수집, 전시, 보존처리 등 체계적인 관리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문화유산 표준시스템에도 등록하여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소장유물 아카이브 사업을 전개하여 유물에 대한 고화질 사진촬영을 비롯해 보다 체계적인 관리‧활용방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5. 중요 유물 소개

정순왕후 국장 반차도는 종전과 달리 한글과 한문이 병용되어 기록화이다. 한글이 표시된 국내 유일의 의궤이다.

박물관에는 토박이문화와 한글의 가치를 담고 있는 다양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 유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소개하면,

먼저 영조의 왕비이자 순조대 수렴청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던 정순왕후의 국장 반차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반차도에는 조선시대 국가의례에 참여하는 문무백관과 기물의 정해진 위치와 행사장면을 정밀하게 묘사한 국가 기록화입니다. 한 장의 사진에 전체를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만 12m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반차도가 뛰어난 가치를 지닌 이유는 한문만 기록되어 있는 종전의 다른 의궤와는 다르게 한글과 한문이 동시에 병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의궤는 국내에 보고된 사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유물입니다.

다음으로 한글고소설 자료를 들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우리글 한글을 유난히 사랑하셨던 한창기 선생의 노력 덕분에 520여 책의 귀한 한글 고소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 심청전을 비롯해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유씨삼대록, 명행정의록, 명주기봉과 같은 장편 가문소설에서부터, 중국소설 삼국지, 서유기, 초한지 등 번역소설도 상당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 현존하는 유일한 경판본소설 책판인 월왕전 책판도 소장하고 있어 한국고전문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고소설 자료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논문과 저서가 출간되고 있으며, 이 자료를 토대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직하신 분들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세 번째로는 민화를 들고 싶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꼽자면 여인도(미인도)를 들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다른 민화들처럼 역시 작가 미상의 민화이지만 잡지 샘이깊은물이 창간 당시 표지로 쓰일 만큼 한창기 선생이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 현재의 우리와 다른 조상들의 미의 관념과 우리 조상 토박이민중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에 주목해 201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대여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작가 미상 민화로 '샘이깊은물' 창간호에 실린 미인도
작가 미상 민화로 '샘이깊은물' 창간호에 실린 미인도

 

6. 뿌리깊은박물관 예산은?

올해 총 2억 4천만원입니다. 인건비와 공공요금 등을 포함한 운영비는 135,296,000원, 여러 사업비와 시설, 부대비를 포함한 사업비 103,029,000원을 사용하였습니다. 박물관 활성화를 위해 앞으로 좀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

 

7. 시민에게 하고싶은 말은?

박물관은 시내에서 조금 동떨어진 순천시 낙안면 평촌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내권에서 멀다보니 관람객의 접근성이 제한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많은 분들이 방문해주고 계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작년 코로나19로 인해 초중고 단체관람객의 방문이 급격히 감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박물관은 시민들의 안전한 관람을 위해 일선 방역요원도 배치하고 다양한 코로나19대비 상시소독과 관련 체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화공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좀더 많은 분들이 우리 박물관에 찾아오셔서 토박이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조상들의 지혜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2019년 ~2021년 간 월별 방문객 수

2019년도 관람객 현황
2019년도 관람객 현황
2020년도 관람객 현황
2020년도 관람객 현황
2021년도 관람객 현황
2021년도 관람객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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