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툼> <해원> 이어 3번째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내년 개봉 전 한국전쟁 70주년 맞아 광주시사회 열어

민간인학살을 다루다보면 ‘골로 간다’는 말이 있다.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이 말은 죽음보다 먼저 떠올리는 공포가 됐다.한국전쟁 때(제주4·3항쟁, 여순항쟁까지 포함) 수많은 민간인학살이 저질러졌다. 군·경, 우익청년단 등이 그 주범들이었다. 전쟁 초 보도연맹사건부터 시작돼 인민군 후퇴기, 빨치산 토벌기에 주로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이때 골(골짜기)로 끌려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골로 간다’는 말이 한국전쟁 이후 공포처럼 퍼졌다. 그렇게 죽어간 민간인들이 2백~3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전 국토가 무덤인 셈이다. 게다가 요즘 휴양림 같은 경치가 좋은 관광지가 대부분 당시 학살터였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화 <태안>이 배경인 충청남도 태안이다.


태안에서 대표적인 관광지로 멋진 바닷가와 해수욕장이 있는 ‘만리포’가 떠오른다. 이 만리포 해수욕장 주차장이 바로 학살터였다. 태안에서는 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학살, 그 다음 인민군 점령기 좌익에서 자행한 학살, 3차 인민군 후퇴기 군경이 자행한 보복학살 등 3차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그 가운데 보도연맹원 학살과 보복학살이 저질러진 곳이 이 만리포 해수욕장 주차장이었다.


당시 만리포 일대는 모래언덕(사구)였다. 태안은 해변을 따라 사구가 발달했는데, 이 사구에 구덩이를 파고 끌려간 이들을 죽이고 파묻었다. 태안은 여름이면 해당화가 활짝 피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태안, 곳곳이 바로 학살터였고, 피학살자 무덤이었다.


영화는 이곳에 끌려가 죽을 운명이었던 당시 소년(현재 80대)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와 함께 끌려가 인근 모항초등학교에 갇혔던 소년은 만리포로 끌려가기 전, 한 여성이 ‘어린 것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죽이냐’며 채 10살이 안된 소년 몇 명을 풀어준다. 그렇게 어머니는 죽고 소년은 살아남았다.

 

 민간인학살터 촬영 장면. 태안에서는 그림같은 바닷가, 갯펄, 산골짜기. 곳곳이 민간인학살터였다.
민간인학살터 촬영 장면. 태안에서는 그림같은 바닷가, 갯펄, 산골짜기. 곳곳이 민간인학살터였다.

그 소년이 80대가 돼서야 당시 자신을 풀어준 여성을 찾아간다. 이미 돌아가셔서 그 무덤을 찾아 술을 따라 올리고 절을 하며 하염없이 고마워한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를 죽인 원수’지만 그 자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화해’를 이렇게 보여준다. 그는 영화 마지막 부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만리포해수욕장 주차장을 찾는다. 끌려가신 길을 더듬어 주차장에선 그는 평생을 안고 온 한이 솟구쳐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제주지역처럼 이곳 태안에서도 학살자 가족과 피학살자 가족이 섞여 살아간다. 애써 과거를 외면하지만 가슴 속에는 앙금처럼 남아 평생을 가는 것이다. 그 한을 풀고(해원),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해’를 꿈꾼다.


영화 속에는 인민군(좌익)이 저지른 학살에 가족을 잃었던 80대 할머니가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고, 같은 마을에 사는 학살자 가족을 이야기하며 ‘화해’를 이야기한다. ‘서로 풀어야 한다’고 말하며 눈물 짓는다.


<태안>은 구자환 감독이 만든 민간인학살 3번째 다큐멘터리다. 구 감독은 인터넷신문 ‘민중의소리’ 경남주재 기자로 일하다가 2000년대 중반 우연히 알게 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을 따라가며 영상에 담았다.


10여 년 동안 짬짬이 찍어온 것이 처음 선보인 <레드 툼>(2015년 개봉)이다. 주로 경남지역 민간인학살을 다룬다. 이어진 <해원>(2018년 개봉)은 전국적인 민간인학살을 시대순으로 따라간다. 제주4·3항쟁, 여순항쟁도 다루고, 인민군 후퇴기 전남지역 민간인학살까지 다룬다. 3번째 영화 <태안>은 태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보도연맹원 학살, 좌익(인민군) 학살, 우익 보복학살 등이 복잡하게 지역에서 얽혀 있다.


이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2명이 안내한다. 한 명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로 딸 유민이를 잃은 ‘유민아빠’ 김영오 씨이고, 다른 한 명은 태안지역 민간인학살을 안내하는 강희권 태안유족회 이사다. 2명을 길잡이로 유족들을 찾아가며 영화를 풀어간다.


영화는 내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7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구자환 감독은 11월부터 경남 창원, 광주, 충남 아산 등 몇 곳에서 시사회를 열고, 한국전쟁과 함께 일어났던 민간인학살을 상기시킨다.


지난달 27일 광주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감독과 출연자 2명이 영화가 끝난 뒤 무대에 섰다. 구자환 감독은 “조심스럽게 김영오 씨에게 출연을 제안했는데, 본인도 힘들텐데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며 “상처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상처를 더 잘 감싸주고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안했었다”고 출연을 제안한 배경을 털어놨다.


김영오 씨는 “나만 참혹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수많은 참담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나라 전체가 민간인학살이 일어난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이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개정돼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이 시작된다. 구 감독도 영화를 찍는 중간중간 국회 앞에서 전국 유족들이 ‘과거사법 개정’ 1인시위나 집회가 있을 때 김영오 씨와 함께 찾았다. 이제 시작되는 2기 과거사위(진화위) 활동이 ‘화해’ 첫 걸음이 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난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남는 게 있다. 영화가 끝나고 ‘태안, 평온하고 넉넉한 삶이 있는 곳’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영화와 대비돼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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