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훈 여순창작가요제 심사위원
박성훈 여순창작가요제 심사위원

지난해 11월 23일, 순천대학교 70주년 기념관 우석홀에서는 매우 뜻깊은 문화행사가 치러졌다. 바로 “2019 여순항쟁 전국창작가요제”(이하 여순가요제).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지 71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날의 아픔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자는 뜻을 담은 음악행사가 공식적으로 열린 것이다.

4‧3항쟁,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6월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아픔을 형상화한 노래들은 참 많이 만들어지고 불러졌으나, 유독 여순사건을 다룬 노래는 많지 않았다. 2003년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의 주도로 제작된 음반 「봄이면 사과꽃이」에 실린 몇몇 곡들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마저도 널리 대중화되지는 못하였다. 

(…중략…) 여순사건에 대한 조명이 늦어진 점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아왔던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여순 특별법 추진을 계기로 열린 여순가요제는 음악을 통해 여순사건과 특별법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인간과 사회의 아픔에 공명하는 문화예술의 한 역할을 추동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여순가요제는 음악인들과 시민사회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적은 수의 참가자들만 모여 ‘조촐’하게 끝나버린 행사로 남았다.

이 글에서 필자는 여순가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음악인으로서 여순가요제의 의미와 한계를 돌아보고 향후 여순사건을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여순가요제가 왜 실패(정성으로 행사를 준비한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필자는 이 행사가 결국 실패했다고 본다)했는지 돌아보자.

첫 번째 이유는,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이 행사가 사실상 관이 주도한 행사였다는 점이다. 관의 재정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예산 확보 과정이 늦어짐에 따라 행사 준비 역시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창작가요제에 참가하는 음악인들에게 ‘창작’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할 만큼 늦은 행사 공고와 그에 따른 음악인들의 외면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관에서는 재정 부담만 크고 효과는 크지 않다고 보았는지 올해 행사는 취소해 버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처음부터 시민사회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가요제 추진위를 꾸려 행사 준비를 주도하고 관의 재정적 지원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면 모든 준비과정이 보다 매끄럽게 진행되고 더 풍성한 행사로 이어져 가요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여순가요제가 벤치마킹할 만한 창작가요제가 국내에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올해로 10회를 맞은 전국오월창작가요제(이하 오월가요제)이고, 또 하나는 다음달에 6회 본선무대를 앞두고 있는 인천평화창작가요제(이하 평화가요제)다.

오월가요제는 처음부터 광주광역시의 적극적 지원으로 치러져 왔지만 행사 준비와 진행은 철저하게 (사)오월음악과 오월창작가요제 추진위원회가 주관하면서 관의 개입을 막았고, 평화가요제는 인천광역시장이 바뀌면서 가요제 지원을 끊어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아 시민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행사를 준비하면서 오히려 가요제의 내실을 높이는 성과를 이루어 냄으로써 다시 관의 지원을 받게 되더라도 관의 지원 여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을 마련하는 역사를 일구어냈다.

관의 지원에 의존하여 일회성 행사를 치르고 관이 지원을 끊어버리자 두 번째 행사를 추진할 동력을 찾기 어려운 여순가요제가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여순가요제가 지원하고자 하는 노래의 지향점이 불분명했다는 점이다.무엇보다 심사위원단 구성이 가요제를 불과 며칠 앞두고 완료되면서 심사위원단 내부에 평가원칙에 대한 깊이있는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가요제의 지향이 모호한 가운데 가요제가 열리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는 행사 준비 자체가 늦어진 첫 번째 이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가요제의 이름이 “여순항쟁 전국창작가요제”로 지어짐으로 인해 “여순항쟁”을 직접적으로 그린 노래만 출품할 수 있는 것으로 비쳐졌고 그로 인해 음악인들의 참가가 많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여순가요제처럼 과거의 아픔을 매개로 하여 탄생한 오월가요제의 경우 가요제의 지향점을 ‘오월정신’에 두고 있다. 반드시 광주민중항쟁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넓은 의미의 ‘오월정신’에 두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에서 출발하지만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가요제 역시 가요제의 지향점을 ‘평화’에 두고 있다.

물론 아직 과거사의 진상규명조차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여순사건의 경우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요제의 지향이 미래적 가치에 있지 않고 과거 역사적 사건을 향해있다는 것은 예술적 접근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 수 있다.

여순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우리가 이루어가려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 내고(예를 들어 ‘**’라고 치자), 가요제의 이름을 여순**창작가요제와 같이 지었다면 음악인들의 예술적 접근의 폭을 훨씬 넓힐 수 있지 않았을까?

출품작들의 음악적 완성도에도 아쉬움이 많다. 현대 대중음악에서 창작은 단순히 작사‧작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편곡과 (가창을 포함한) 연주까지도 모두 창작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창작가요제에 참가한 뮤지션이 반주음악(MR)을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아예 노래까지 함께 녹음한 음원을 플레이하는 풍경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왜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여순가요제 예선에서는 절반에 가까운 참가 음악인들이 MR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다른 창작가요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 역시 창작가요제의 예술적 지향을 분명히 공표하지 않은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세 번째 이유는 큰 예산을 들여서 준비하는 뜻깊은 음악행사였는데 정작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음악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음악인들은 그저 상금 크게 걸고 행사를 개최하면 상금을 받기 위해 노래를 만들어 참가하는 존재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음악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행사로서의 모범사례는 평화가요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화가요제는 총연출을 전문 음악인이 맡아서 진행할 뿐만 아니라, 행사를 진행하는 스탭과 가요제에 참가한 본선진출자들이 워크숍을 함께 하면서 평화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참가 음악인들은 단순히 가요제 수상 경력을 쌓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철학을 돌아보고 가요제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는 가요제 본선 무대가 관객과 함께 어우러지는 명실상부한 평화의 축제로 치러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창작가요제 중에서도 평화가요제 참가자분들이 가요제에 대한 만족도가 특히 높은 가장 큰 이유가 진행 과정 속에서 스탭과 관객으로부터 존중받고 그들과 소통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는 점이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여순가요제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어렵게 준비한 가요제를, 그것도 고작 한 번밖에 치르지 못한 가요제를 실패로 단정짓는 것은 한편으로는 야박하고 또 한편으로는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여순가요제가 가졌던 의미가, 그리고 앞으로 (이 행사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찾아가야 할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작년의 아쉬움을 거울 삼아 시민사회와 음악인들이 연대하여 소박한 규모로라도 여순을 기리는 음악회를 꾸준히 열어 나간다면, 시대의 아픔과 문화예술이 만나 연민과 우애를 나누고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작은 빛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물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라 사람일 것이다.

- 편집자 주 -

11월 3일 순천대학 여순연구소가 주관한 여순 10.19 72주년 기념 학술원탁회의에 발표한 글을 게재했다. 분량 관계상 내용 일부를 중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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