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는 차를 몰고 절에 가면서도 눈물이 났다. 장맛비는 여전히 장대처럼 퍼부었다. 와이퍼를 최고로 돌려도 시야가 흐렸다. 눈물까지 겹쳐 운전이 쉽지 않았다.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아내를 떼어놓고 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이러다 절벽으로 구르지 싶은 거였다. 올라가는 길은 그래도 괜찮지만 장대비가 계속된다면 내려가는 길은 더 위험할 게 뻔했다. 오십세 두의 소 중 겨우 열한 두가 살아 있다니, 빚 감당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아내가 기어이 함께 가겠다고 하는 의중 또한 혹 기수가 그동안 일군 업(業)을 업(殗)으로 여겨 생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깊은 우려에서 기인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끝내 옆 좌석을 내주지 않고 홀연히 액셀에리터를 밟은 건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게 아닌 탓이었다. 기수는 오르다 구를 순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내려가는 길에 굴러야 그나마 사고일 터였으므로 올랐다. 절에 이르렀고, 소를 만났다. 아, 살아 있다니…하물며, 절에까지 갔다니, 어떻게 십여 리 길을 올라갈 수 있었단 말인가? 여기가 살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단 말인가?

명우(茗虞)는 주인에게 이끌려 빗길 내려가는 열한 마리 소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한참을 바라보던 명우는 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빗물과 함께 얼른 소매로 훔친다. 요사채로 향하지 않고 법당에 든다. 경(經)을 되뇐다. 독경에도 여전하다. 소를 보내고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안전한 곳이라며 오른 처소가 무색하다. 무릇 명(命)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 여기라면 그들, 품어야 했다. 절집에서 축생 거느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거니와 값 치루기 또한 벅찬 일이긴 하였다. 도반들 동의 구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절집에 머무는 하루 반나절 동안 명우는 참 애틋하게 돌봤다. 어린 날, 속가(俗家)에서 풀 베어다 주던 기억이 새록새록 일었다. 절집이 좁아 둘 데가 마땅하지 않았으나 아랫마을 처사 둘을 불러 마당에 차일치고 나무난로 피워 저체온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물은 주었으나 먹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터에 아랫마을 처사가 볏짚 구해와 먹였다. 주인이 고맙다고 연신 주억거렸다. 명우는 의아하리만치 몹시 냉정하게 그와 그들을 보냈다.

생태농업하겠다고 귀농한 기수가 이른바 관행농업인 생업농업의 길로 접어든 건 궁핍해지는 삶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연유였다. 전적으로 그랬다. 현실은 무자비하게 기수를 옭아맸고, 돈푼이나마 쥘 수 있다는 소에 꽂혀 4년여를 보낸 기수다. 월령 23개월쯤 도축장으로 보내며 안타깝고 마음이 여위는 걸 느껴온 바다.

애당초 우사(牛舍)에서 태어나 보지 못했던 큰물 진 강을 보고, 걸어보지 않았던 네 발로 인간들의 길을 걷고, 산모퉁이 돌고 돌아 절집에 들었으니, 이곳이 무사(無死)의 터임을 그대들은 어찌 깨달았단 말인가? 우사로 돌려보내며 애섧고 서글픈 명우다. 여직 세사(世事)에 흔들리는 불초, 그대들 생로병사인들 어찌 감당하오리.

다시 사지(死地)로 소를 몰고 가는 기수는 스님의 차디찬 눈빛을 도려내지 못한다. 차에서 내려 세찬 빗방울에 온몸을 내맡긴다. 소들이 따라 멈칫한다. 담배 연기에 한숨 섞어 내뿜는다, 기수가…독경이 여전히 어지럽다, 명우는.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