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그동안 써 오던 트럭을 폐차하고 새 차를 구입했다. 차가 워낙 낡아 올해에는 바꿀 계획이었지만 시에서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경유차를 조기에 폐차하면 보조금을 준다고 하여 시한에 맞추느라 애를 썼다. 보조금 액수는 차의 나이에 반비례하므로 내 차의 보조금은 37만 원으로 최저라 한다. 미세먼지 농도의 경보가 발령되면 시내에 진입할 수 없다는 통지도 봄에 받았고, 폐차를 독촉하는 전화도 있었던 데다 최근에 시내로 진입하는 주요 도로에 해당 차량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설치되면서부터는 과태료 걱정으로 시내 진입을 하지 못했다. 마음이 바빠졌다.이 녀석은 내가 귀농하던 해 가을에 구입했으니 무려 19년 동안 나와 농사일을 함께 했다. 폐차장에 녀석을 넘기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짠하다. 내가 애지중지하며 관리할 위인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어 차의 외관은 여기저기 부딪치거나 찌그러진 곳이 많았다. 짐칸의 문짝들은 잦은 퇴비 운반으로 접히는 부위에 부식이 심해 차체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고, 잠금장치도 많이 닳아 달릴 때마다 덜덜거렸다. 하부는 보조 쇼바(완충 스프링) 한 개의 용접 부위가 삭아 브레이크에 연결된 강선을 누르고 있었고, 소음기와 연통도 부식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 떼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늦어 속도가 제때 줄지 않았고, 핸들은 파워오일이 시나브로 새 나가 무겁기만 했다. 운행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기도 했지만 벌교 읍내를 다녀오는 것만도 이만저만한 민폐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만 하다 머지않아 해체되고 찌그러지리라 생각하니 생명 없는 물건이지만 몹시 미안했다.

이 녀석과 나는 그동안 22만 km을 달렸다. 서울 생활하면서 쓰다 낙향한 해에 폐차한 승용차와 달걀 배달용으로 쓰다 폐차한 경승합차 두 대의 주행 거리도 각각 20만km가 넘었으니 우리 가족이 그 동안 차를 타고 쏘다닌 거리가 어림잡아 90만km는 족히 될 듯하다. 지구의 둘레가 약 4만km라 하니 나는 30년 동안 화석연료를 사르면서 지구를 20바퀴 이상 돈 셈이다. 이쯤 되면 지구의 기후위기를 불러오는 데 나도 한 몫 단단히 하지 않았는가. 누구를 탓할 처지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대체할 트럭을 구입하는 일은 트럭을 처음 살 때와 똑같은 고민거리였다. 가격 부담을 생각하여 중고차인가, 새 차인가? 미세먼지 배출이 적어 신차 구입에 400만 원을 지원해준다는 LP 가스차인가, 아니면 힘도 좋고 면세유 혜택도 받을 수 있는 경유차인가? 차체가 높아 내 부실한 몸으로 오르내리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우리네 산골 지형에 편리한 사륜구동 차인가, 특성이 반대인 후륜 구동 차인가? 트럭 없이 산다는 것은 선택지에 아예 들어가 있지도 않다. 가격과 효율성, 편의성 등 기후위기를 불러온 현대인의 경제생활의 모토가 선택을 완벽하게 지배할 뿐이다. 인식과 실천 사이의 이 커다란 괴리를 어떻게 메꿀 것인가.

가톨릭에는 축성(祝聖)이라는 행위가 있다. 신자들이 십자고상이나 묵주 등 성물을 살 때, 집을 새로 지어 입주하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에 사제가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는 일이다. 가끔 성당 마당에 새로 산 차를 가져와 가족 및 지인들 여럿이 모인 가운데 축성하는 일이 있다. 민간의 고사를 대신하는 일이다. 아내는 안전 운행을 위해 축성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주범 중에 하나를 모셔두고 단지 나의 안위만을 위해 신의 축복을 바라는 일이 당치 않아 보여 축성을 받지 않을 생각이다. 삶과 인식의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을 나는 이런 모습으로 씻으려 한다.

우리나라 올해 자동차 등록 대수가 2,400만 대를 넘어 인구 2명당 1대에 육박하는 중이고, 중국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2억6천만 대를 넘었다고 하고, 미국은 인구 100명당 자동차가 80대인 세상에서.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