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2주년에 정명(正名)을 생각한다

문학박사, 여순연구소 연구원
문학박사, 여순연구소 연구원

다음 달 19일은 ‘여순사건’ 발발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 10·19사건희생자추모제는 전라남도 주최로 구례에서 봉행할 예정이다.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에서는 2020년 5월 하순부터 8월까지 10·19사건 구례유족 60명 정도의 증언을 들었고, 그 결과물인 『여순사건구례유족증언집』 출간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구례 추모제에 피와 한이 맺힌 유족증언록을 희생자 영령께 올릴 것이다.

여순연구소 연구원 중 한 사람으로서 구례 유족들의 증언을 들으며 참 많은 생각과 감회에 잠겼다. 구례가 고향이고, 할아버지가 희생을 당한 유족 3세인 내가 구례의 10·19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자책이 가장 컸다. 그리고 구례읍의 주요 민간인 학살지인 양재이(양정) 깽본, 서시천변, 유곡 섬진강변 대밭이 8·8수재로 초토화된 것이 가슴 아팠다. 역사적 비극과 수해의 참담함이 겹치는 모습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책무감으로 나를 누른 것은 ‘여순사건’ 명칭이었다.

여수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하여 여러 시군으로 확산된 역사적 사건을 우리는 맨 처음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불렀다. 교과서에서는 ‘여수·순천10·19사건’이라 하고, 현실적으로는 ‘여순사건’을 가장 많이 쓴다. ‘여순항쟁’이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간 무자시월사변(戊子十月事變), 여순반란, 전남반란사건, 제14연대반란사건, 경비대반란, 여순병란, 여순봉기, 여순학살, 여순군민(軍民)항쟁 등 10개가 넘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김득중은 『빨갱이의 탄생』에서 여러 명칭에 대해 고찰하면서 여러 이름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연한 말씀이다.

10·19사건으로 여수·순천뿐 아니라 구례 광양 벌교 고흥 영광 함평 대구 등 전국 여러 시군이 피해를 입었다. 구례는 어느 지역보다 10·19의 여파가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지역이고, 피해도 많았다. 그런데 왜 이름에 구례 광양 등은 없는가? 여·순이 사건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 이름이 정명(正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일인데 한두 지역만 넣어 명명하면 특정 지역이 명예로운 역사를 독점하거나 부정적 이미지를 혼자 뒤집어쓰는 현상이 생기고, 사건의 의미가 축소되어버리기도 한다. ‘광주5·18’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항쟁을 함께한 화순·해남·나주·목포 등 다른 지역과 민중은 소외되어버린다. 그래서 공식 명칭이 ‘5·18민주화운동’인 걸로 안다. 최초 발생지를 이름에 넣는 것이 맞다면, ‘여순’이 아니라 ‘여수’사건으로 명명해야 맞지 않을까? 그런데 정작 그 일로 가장 오래 피해를 본 지역이 지리산 아래에 있는 구례였다. 왜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큰 피해를 당한 구례 광양 영광 함평 등은 사라져야 하는가?

나는 역사적 사건의 이름을 지을 때 지역 이름을 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역사적 사건 이름은 거의 다 그렇게 지었으며, 그런 이름이 역사적 의미를 더 폭넓게 담을 수 있고, 논란의 소지가 없기 때문이다. (특수한,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갑오개혁, 6·10만세운동, 3·1운동, 6·25전쟁, 6·10항쟁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나는 여수·순천10·19사건을 10·19사건이나 10·19항쟁으로 이름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물론 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지만, 교과서나 법 등 공식 문서에서는 10·19사건이나 10·19항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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