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최성문 편집위원

- 『빨치산의 딸』은 젊은 날의 자서전

- 내 의지가 아닌 시대가 낳은 운명

- 통일, 쉽지 않겠지만 되기는 할 것

남부군 마지막 생존자 이옥자 씨와 인터뷰 장면 (사진 : 정미경 소설가)
남부군 마지막 생존자 이옥자 씨와 인터뷰 장면 (사진 : 정미경 소설가)

 

이옥자. 본명은 이옥남. 향년 95세. 소설 『빨치산의 딸』의 주인공이자,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의 정치지도원. 스스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으며, 분신과도 같은 딸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 존재.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 젊은 날 목숨 걸었던 지리산 자락 『검은 방』(2020년 출간된 정지아의 소설 제목)에서 금기의 존재 ‘빨치산’을 증명하고 있다. 그녀는 올 1월 남부군 출신의 하수복이 타계함에 따라 현재 이 땅에 남은 남부군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 지난 6월 1일 오랫동안 갈망했던 만남을 더는 미룰 수 없어 그녀가 머물고 있는 ‘검은 방’을 두드렸다.

그녀는 1926년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에서 태어났고, 18세에 구례군 광의면 최 씨 집안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1948년 당시 남편 최규복를 잡으려고 경찰이 집요하게 추궁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피신하듯 산으로 갔다. 이현상부대 정치위원이었던 남편과 어린 아들마저 산에서 잃었다. 시아버지는 토벌대에 총살당했으며 시동생들도 산에서 죽었다. 그녀는 1950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지하활동을 위해 경남도당으로 옮겨가는 1953년까지 이현상을 보좌했다. 그러다 1954년 환자트(환자비밀아지트)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하산하게 되었다. 하산 이후 5년간의 감옥살이 마친 후 정운창(구례 문척 출신 빨치산, 2008년 작고)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고, 딸 정지아(소설가)를 낳았다. 현재 그녀는 구례군 간전면 산자락에서 딸 정지아와 함께 살고 있다.

안녕하세요? 딸의 소설을 통해 어르신을 접해서인지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소설에서요?

『빨치산의 딸』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어르신이 등장합니다.

『빨치산의 딸』 그것은 내 자서전이라. 그 때 다 잊어버려서 생각나는 것만 썼는데 그래도 비교적 많이 들어갔어요. 실천문학사 그분(당시 ‘실천문학사’ 사장이었던 소설가 송기원)이 권유해서 썼지, 아니면 안 쓰죠. 뭐 하려고 쓰겠어요. 자꾸 권하니까 할 수 없이 쓴 거지.

 

이옥자 씨의 삶을 다룬 소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좌)과 『검은 방』(우)
이옥자 씨의 삶을 다룬 소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좌)과 『검은 방』(우)

여기 풍경은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은가요?

좋은 것도 모르겠고. 요새가 좋지 뭐. 저 산을 보면 내가 올라 다녔던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나와.

젊은 날 활동했던 산 옆에서 사시니까 그때 일들이 생각나시죠?

(산을 가리키며) 저기 있었죠.

어르신은 어쩌다 산에 가시게 됐어요?

남편 잘 만나서 그랬지, 뭐. 좋다고 하니까 좋은 줄 알고. 맨 처음에는 본 시가에 살 때 (광의면) 여맹위원장을 했어. 그때는 극비지 뭐. 남편이 시키니까 좋고 나쁘고 그런 것도 모르고 했어. 나중에는 이게 아니구나 …. 그때는 죽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래 사상이 무서운 거여. 그렇게 무서워. 내가 생각해도 사상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입산은) 남편 때문에 간 거보다는 48년도에 내가 시집에 살 때 경찰이 본남편을 잡으러 다녔어. 그때 본남편이 구청에 다녔나 그랬어. 나는 애를 데리고 피난을 갔었어. 자꾸 잡으러 오니까. 군인들이 한 떼로 와서… 잡혀 가서 내가 그 소리를 했어. “나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다 조사해 보라고. 나는 시집살이 하느라 밖에도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진짜로 그랬어. 애도 있고 진짜로 밖에도 못 나가고 그러는데 남편을 자꾸 잡으러 와서 “어디 있냐?”고 하니까. 하두 (경찰이) 괴롭혀서 살라고 올라갔지.

산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두렵지 않으셨나요?

처음에는 몰랐지. 남편이 그런 짓을 하니까 애를 업고 산으로 갔어. 잡아가려고 하니까 자동적으로 산으로 갔지. 혼자 가도 무섭지도 않아, 밤에도. 집에 있으면 좀만 어두워져도 밖에 나가면 무섭고 그러는데. 그렇게 돼버리니까 무섭지도 않고. 그때는 남편이 한 짓이 좋은 짓인 줄 알았지. 좋다고 하니까. 남편이 나한테 잘 했죠. 내가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게 컸는데, 여자도 산에 가면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공부가 하고 싶어서…. 운명이라는 것이 무서운 거죠. 그렇게 되는 거야, 그냥. 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야,

박종하에 대한 기억은?

겨울밤에 소 잡아먹고, 박종하가 소 거시기 먹이고. 초기에 그랬지. 박종하 그 사람 하는 짓 보면 참 보통 사람 아니여. 키도 크고 잘 생기기도 했지만 마을에만 들어가면 여자들이 따라나서. (박종하 따라) 산에 올라간다고. 그런데 죽을 때는 허망하게 죽었지. 가회에서(1951년 8월 10일경 경남 합천군 가회면에 소재한 가회지서를 빨치산이 습격하여 토벌대와 전투를 벌인 바 있음.) 그 사람은 총알이 빗발쳐도 꼿꼿이 서서 다녀.

(박종하가) 나를 보자 한다고, 아침에 사람을 보냈어. 그래서 내가 가니까 할아버지 옷을 빌려 입고, 두루마기, 도포까지 입고 딱 앉아서 그래요. “해방되면 우리 구례(고향) 같이 가자.”고 그랬는데 (가회전투에서 총을 이마에) 맞아버렸어. 꼿꼿이 서서 다니니까 총알이 빗발쳐도 숙일 줄도 모르고….

박종하는 내 본남편 최규복이 친구야. 세상 참, 세상 탓이지 누구 탓 아니야. 나쁜 사람들 아니야. 다 나쁜 사람들 아닌데 나쁜 짓하다 가는 것처럼 됐지.

박종하의 최후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요?

자는데 (부관이 와서) 나보고 나오라고 해서 나가니까 박종하가 총 맞았다고 해서 따라가니까 박종하를 보여주더라고. 덮어놨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죽음이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어요, 조심하고, 고개를 숙인다든가 그랬으면 안 죽었을 텐데. 그냥 총알이 빗발치는 데를 평소 하던 대로, 항상 그래도 안 죽었으니까, 안 죽을 줄 알았겠지. 죽을라고 그랬나 봐. 고향 같이 가자고 한 거, 그건 안 잊혀, 나는.

이현상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현상 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이죠. 나무랄 수도 없어요. 기억 많이 나죠. 이 사회에서 나는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 못 봤어요. 평생을 고생만 하신 분이지. 한 가지 걸리는 게 하수복, 하수복이 때문에…. 박종하가 붙여줬어. 그건 내가 확실히 알아요. 내가 그런 거 관리하고 그러니까. 하수복이 나한테 더러 다녔어요. 오래됐어요. 나 징역 갔다 나와서 살 때. 하수복이 같은 사람도 없어요. 죽었다드마.(2020년 1월에 타계한 것으로 알려짐.)

이현상의 어떤 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신가요?

여자라고 해서 반말하고, 무시하고, 그런 거 하나도 없고. 나 같은 사람도 대우 받고.

호칭은 어떻게 하셨어요?

전부 다 ‘선생님’이라고 했어. ‘사령관 동지’ 그런 거 안 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 얼굴은 미남이지. 여자라고 해서 말 한마디도 잘못하고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책에 보니까 이현상에게 버선 만들어 주셨던데요?

산에 올라가니까 전부 맨발이야. 보니까 어떤 영감이 그냥 헝겊으로 발을 이렇게 싸고 있어. 비상용으로 싸 짊어지고 다니던 거 그걸 끄집어내서 버선을 만들었어. 산에서 만든 거라 좀 이상했던가, 모르겠어. 이현상 선생님이 “버선을 다 만들 줄 아느냐?”고 그래. 내가 버선 한 켤레 만들어 드린 거지.

『빨치산의 딸』에서 6‧25 터지고 남편 분이 낙동강 전투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나오는데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어떻게 됐는지 몰라.

순천 사람 제14연대 출신 이영회 아세요?

이영회. 산에서 사령관이야. 그 사람 참 훌륭하죠. 맨날 같이 있었죠. (그런데) 다 잊었어요. 근디 나 같은 사람은 참 이상한 사람이야.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냥 그래요.

제14연대 김지회도 보셨나요?

봤지요. 똑똑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 그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됐거든요. 그 사람 때문에 빨치산도 생기고 그랬죠. 아니면 빨치산이 안 생겼지. 누가 하나 둘 올라가서 숨어 다닌 정도였겠지.

산에서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나는 아무 짓도 못했어. 몸이 약해서 통. 내 배 속에 지금 세 가지 것이 없어요. 살면서 수술을 댓 번했어. 걷지를 못해, 산에서는 밥을 못 먹었어. 밥이 없으니까. 2주도 굶어 봤어. 그래도 안 죽어요. 먹어서 안 죽는 건 다 먹었어요.

산에 여자 분들은 어느 정도 있었어요?

많이 없어요. 양봉순. 박정애. 박정애는 완전히 촌 여자. 근데 훈련 와서 시키면 다 하는 거지. 양봉순은 똑똑해. 박정애도 똑똑한데 부상당해서 흉이 많이 졌지. 그런데 어디서 없어졌는지 모르겠어. 나하고 같이 남부군으로 갔는데.

여자들은 산에서 살기가 더 어렵죠?

어렵지만 내려오면 죽으니까 할 수 없는 거지. 있고 싶어서 있는 사람이 드물지. 맨날 산을 걸어 다녀야 하니까.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활이라고 할 수도 없지.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여. 당하면 다 살게 돼 있어요.

아이는 어떻게 된 거죠?

산에서 살겠어요?

자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어요?

감히 그런 생각을. 산에서 내려와도 죽어. 감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딸 정지아와 함께 지리산 형제봉에서(2010년 9월.  조성봉 감독 제공)
딸 정지아와 함께 지리산 형제봉에서(2010년 9월. 조성봉 감독 제공)

어르신은 어떻게 잡히셨나요?

이명재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하고, 영감님 둘 하고, 여자는 남쪽에서는 나 하나. 남의 집 머슴 살던 할아버지가 있었어. 이명재가 북에서 왔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잡힌 거지. 언제부턴가 수상해. 보면 수상하더라고. 암만 해도 이상해.

그때 설마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겠냐,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애를 썼지. 산에 좋은 바위가 많이 있어. 바위 속에 비를 안 맞게, 그 속에 있는데 그 사람이 면도를 좋게 하더라고. 면도는 왜 하느냐고 하니까 싱긋이 웃고 아무 말도 안 해. 그래도 그 사람이 자수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근데 내려가더라고. 작정을 하고 뭔 일을 꾸몄던가 봐. 얼마 있다가 저기서 뭐가 오드라고. 찬찬히 보니까 이명재여. 딱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고. 서서 보다가 피하려고 돌았는데, (토벌대가) 딱 보듬어 버리더라고. 이미 이명재가 말해서 군인들이 포위해버린 거여. 포위하고 나한테까지 접근해버렸어. 그래서 내가 이명재를 보고 별소릴 다했지. 막소리를 했지. 내가 물 흐르는 골짜기에 (이명재를) 밀어버리려고 했어. 그러고 가는데, 그리 가나 안 가지. 그래 따라오면서 (이명재가) “동무 우리 살고 봅시다, 살고 봅시다.” 계속 그러네. 아무 지장 없이 할 거니까 살고 보자고. 그러고 따라와. 그 사람은 살았을 거여.

그 뒤로 만나본 적은 없으시고요?

못 만났죠.

산에서 내려오셔서 어떻게 되셨나요?

형무소로 바로 갔어. (산에서 내려왔어도) 나는 안 변하니까. 전주형무소에 살았어.

정운창 씨 만난 이야기 좀 해 주시겠어요?

정운창 씨를 만난 것은 처음부터 알았던 것이 아니고, 그때 (광의면에서) 여맹운동 같이 하던 사람이 나하고 친한 사람의 누님이었어. 그 사람이 기어이 ‘나하고 운창이 하고 살아야 된다’ 하면서 붙여준 거여. 오랫동안 (둘이 결혼하라고) 사람을 못 견디게 했어.

산에서 활동하시면서 정운창 씨를 만나신 적이 있나요?

못 만났어. 거기는 백아산에 주로 많이 있었어요. 나는 지리산에 가 있었고.

정운창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떠셨어요?

처음 만나도 무슨 생각이나 했겠어요? 생각도 못했지. 나하고 친한 사람 곽영근이라는 사람이 “기어코, 꼭 둘이 만나서 살아야 된다.” 그런 거지. 광의 대산리 사람. 지그 누님이 나하고 같이 일을 했지. 한 몇 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같이 만나 살아야 된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지, 뭐 마음에 들고 그런 거는 없었어.

딸이 쓴 작품을 보면 남편 분(정운창 씨)과 참 정다워 보였습니다.

나쁘게는 안 살았죠. 아파서 죽게 생겼을 때 나하고 둘이 차를 타고 순천으로 가는데 이렇게 손을 내밀더라고. 그때 손을 잡았어. 그 뒤로는 그런 것도 모르고 가버렸으니까. 허망하게 가 버렸어. 그렇게 많이 고생도 안 하고. 마음에 걸리고 그런 것도 있지만, 사람이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 게 정한 이친데 뭐.

남편 분 자랑을 해 주신다면?

자랑할 게 있어야 하지요. 동네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영감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요. 동네일 다 하지. 자기 일만 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지. 남의 일이라 생각 안 해. 뭐든지 보면 내 일처럼 해.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내 일 같이 생각하고. 좋은 성질이야.

보고 싶지 않으세요?

한번 오면 가는데 뭘 보고 싶고 그래요. 처음에는 좀 서운하고 그러죠. 언젠가는 꿈을 꾸니까 (남편이) 문을 탁 열드만 또 문을 탁 닫고 달아나버려. 그래 내가 ‘왔으면 말이나 한 마디 하지, 말도 안 하고 달아나네. 그럴 거면 뭐 하러 왔을까’ 그러고 말았어. 한번 오면 가는 것이 정한 이치고 그렇게 알아버리면 되지 뭐. 자기나 나나 그래. 근데 자식이라는 것이 뭔지, 딸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어.

남편 분이 생각나고 그런 적은 없어요?

인제 좀, 기왕이면 더 살지. 성질이 급해. 죽을 때 되면 가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 살겠다 그런 거 없어. 사랑 그런 것도 없고. 나는 사람도 아니여. 살고 싶고 그런 거 없지, 뭐.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죽는 게 하나도 안 무서워. 복잡하네, 말하기가.

전에는 늘 감시당하는 느낌이라고 하셨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없어요. 그러든가 말든가. 잡아가지는 않을 거고. 바른 대로 말하지 뭐.

통일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시는 거죠?

그렇죠. 쉽게는 안 되겠지만 아무 때든 되기는 하지.

그때 좋았던 사상, 그때 꿈꾸었던 그런 세상이 지금 조금이라도 이루어진 거 같으세요?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옛날같이 크게 막, 형무소 보내고 그러지 않으니까. 조금 좋아진거지. 시대가 달라져서, 많이 달라졌지. 달라지면 달라지는 대로 살면 되지.

당시 구례 지역이 피해가 심했는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까요?

그 사람들이 모르고 당했으니까. 나는 누구 개인의 운명이 아니고 그런 시대를 타고 나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각자 겪은 대로 풀어가야지. 본인 아니고는 남의 것을 제대로 평가를 못하는 거죠, 안 그래요?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걸까요?

이렇게 만나도 빈소리 안하고, 사실 그대로 보고, 듣고, 얘기하고, 그런 거지 뭐. 그럴 수밖에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런 말도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죠?

그렇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때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아니까.

목소리도 좋으시고 말씀도 잘 하시네요. 특별히 아프신 데는?

불편해서 이렇게 기대고 있는 거 말고는. 지금 세 가지 거나 빼 내버렸어. 그러니까 오히려 안 아프고. 이렇게 한쪽으로만 앉아서 그렇지. 잠도 한쪽으로만 자야 되고. 늙으면 가야 돼.

어르신을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또 오면 반겨 주실 건가요?

사람 만나면 좋지. 죽기 전에 와. 잘들 하고 살아. 얼마 안 길어.

 

인터뷰를 함께 한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연구원들. 왼쪽부터 임송본·정미경·오미옥 연구원, 그리고 필자(사진 : 송은정 연구원)
인터뷰를 함께 한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연구원들. 왼쪽부터 임송본·정미경·오미옥 연구원, 그리고 필자(사진 : 송은정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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