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소설가. 문학박사. 현 순천대학교 강사, 여순연구소 연구원)
정미경 (소설가. 문학박사. 현 순천대학교 강사, 여순연구소 연구원)

“네 엄마가 나와 이렇게 만나는 사실을 알고 있니?”

뜨끔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별순은 같이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해줄 수도 있다는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마을 사람들이 평화고물상을 얼마나 꺼려하는가 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나는 펄쩍뛰었다. 호락호락 별순의 말을 따를 수는 없었다. 공마당에서 우등생으로 군림하는 내가 그깟 영화 때문에 별순 따위에게 굴복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만 땅거미가 짙어가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면서 엄마를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 별순이 다가와 내 귀에 속삭였다.

“오늘 밤 그 작자를 죽일 거야. 같이 할 거지?”

별순의 아버지는 평화고물상 사장이다. 내 아버지처럼 거의 집에 없다. 그가 보일 때는 별순 엄마가 매를 맞을 때다. 그는 마당에 뒹구는 쇠붙이들 중에서 무엇이든 집어 들어 별순 엄마에게 휘두른다. 간혹 밤이면 나는 엄마 몰래 집에서 빠져 나와 별순의 엄마가 맞는 모습을 숨죽여 구경하고는 했다.

할 말을 잃은 채 어둠 속에서 희번덕거리는 별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살피면서 별순은 나를 담장 아래로 밀어붙이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마당 우물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옷부터 훑었다. 흰 운동화와 녹색의 멜빵 나팔바지와 흰색의 블라우스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겉에 걸쳤던 빨간 털 코트는 어디에 둔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반란군 새끼 같이.”

엄마는 내가 조심스럽게 벗어 내놓은 옷들을 한데 둘둘 뭉쳐 빨래대야에 거칠게 내던졌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염병할 세상을 만난 거지, 지가 뭔 죄를 졌다고. 그깟 놈의 세상, 지 죽인 더러운 세상에 폐부까지 고였을 울분, 썩은 가래 뱉듯 싹 끌어올려서 팍 찌끄러버리고 살지, 뭔 죄를 졌다고 섞이지를 못해. 언제까지 눈 귀 입 틀어막고 지 숨통 죄며 살 것이여.’ 그러니까 엄마는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아버지 때문일까. 엄마는 어두운 방에 들어앉아서 가끔씩 나타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일까. ‘쓸 만한 놈들은 죄다 뿌리치고 어쩌다 뜬구름 잡는 그런 위인을 만나 이 청승을 떨고 사느냐는 말이지.’ 나는 외할머니의 이 말에 동의한다. 아버지는 예비군 중대장이다. 그리고 건축 일을 한다. 개발을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아버지는 얼굴이 가물가물 잊혀 질 때쯤 한번 씩 나타난다.

엄마가 옷을 내던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죄인처럼 잔뜩 움츠렸다. 그러나 방심하는 순간 와락 웃음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입을 막았다. 나는 톡, 하고 정교하게 세워져 있는 도미노의 첫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그 모습을 상상하자 누가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온몸이 뒤틀렸다. 짜릿했다. 내가 만든 도미노 게임이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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