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춘희 (어린이책시민연대 활동가이자 교육희망네트워크 상임대표. 걷는 걸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는 걸 즐기며, 순천의 매력에 한껏 빠져있는 아줌마)
변춘희 (어린이책시민연대 활동가이자 교육희망네트워크 상임대표. 걷는 걸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는 걸 즐기며, 순천의 매력에 한껏 빠져있는 아줌마)

순천에서 처음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담벼락을 서로 넘나드는 지붕과 울퉁불퉁한 경계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었다면 두 번째는 점심시간 후에 쉼을 위해 두 시간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일주일에 5일씩만 문을 여는데, 심지어 밤에도 일찍 문을 닫는 가게들이었다. 노부부 두 분이 함께 운영하는 문화의 거리에 있는 가락국숫집은우동집은 저녁 7시면 가게 문을 닫는데 재료가 떨어지면 더 일찍 문을 닫기도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낮에 줄을 한참이나 서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손님이 많이 찾는 곳인데도, 일주일에 이틀을 쉬고 문 여는 시간은 점심에 세 시간, 저녁에 세 시간이 전부였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가계 운영이 잘 되면 잘 되는대로 문 여는 시간을 늘려 수익을 높이고, 가계 운영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받기 위해 영업시간을 늘인다. 소비하는 입장에서도 언제든 필요한 시간에 가게를 이용하는 편리함을 포기하기 쉽지 않다. 한번은 도서관 운영 시간을 두고 도서관 전문가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도서관을 이용하도록 밤 11시까지 도서관 야간운영을 하자고 헸다. 도서관 활성화 방안으로 제안된 의견인데 일을 끝내고 저녁 시간에 도서관에서 문화를 즐기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야간에 일해야 하니 하루 정도 조금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 문을 열고 이외에는 무인으로 도서 대출 반납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자고 설득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기도 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일컫는 일과 삶의 균형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이 유행어로 퍼지기도 했지만, 삶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데 순천에서는 이미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문화의 거리와 순천 대학교 사이에서 발견한 작은 카페 역시 일주일에 2일은 쉬고 5일 문을 여는데 탁자가 3개뿐이다. 여러 번 찾아갔지만 쉬는 날이거나 일찍 문을 닫거나 자리가 없어 번번이 돌아서야 했는데, 욕심내지 않고 사는 모습 덕분에 돌아 나오는 마음마저 여유로웠다.

30년 전, 호주에서 살다 온 이는 일주일에 4일을 일하면 7일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해가 지면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저녁 시간을 가족들이나 가까운 이웃들과 보내는 그 삶을 몹시 부러워했는데 순천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세 번째는 순천을 걷는 사람들이다. 친구의 소개로 새벽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걸었다. 토요일 새벽에 모여서 날이 밝아오는 동안 두어 시간을 보면서 걸었다. 내가 간 날은 서천을 따라 걸었는데 어둠에서 시작해 날이 밝아오는 걸 느끼며 걷는 것이 좋았고, 벚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길도 좋았고, 사람들이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혹은 혼자서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그저 걷는 것이었다. 누군가 돌아가자고 할 때까지 한없이 걷다가 되돌아왔다. 이걸 계기로 순천을 걸어 다니게 되었다. 집에서 옥천을 따라 걷다가 동천을 건너 조금 더 가니 몇 번이나 차로 다녀왔던 빵집이 나오고, 친구들과 자주 가던 카페도 있고, 반대 방향으로 가니 순천역이 나왔다. 가는 길에 웃장, 아랫장, 역전 시장, 중앙시장을 만났고, 하루는 우연히도 아랫장 장날이라 욕심껏 이것저것 장을 보기도 했다. 이날은 택시를 타고 돌아와야 했는데, 이날 산 싱싱한 오징어와 새우, 부추와 마늘로 부침개, 스파게티, 리소토, 감바스까지 몇 날 며칠을 맛난 음식을 먹었다.이렇게 걷다 보니 차로 다니던 길 대부분을 30~40분이면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문화의 거리에 사는 나는 버스 종합터미널이나 순천역까지는 쉽게 걸어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새벽길을 걷는 사람들과 조계산을 갔는데 평소 걷던 길과 달리 꽤 가팔랐다. 여느 때라면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산을 올랐을 텐데, 이날은 쉬엄쉬엄 산을 걸었다. 이름 모르는 꽃들을 살피며 봄기운 가득한 산을 느끼며 천천히 걸으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산꼭대기를 넘어 내려가는데 숨을 헉헉 몰아쉬며 정상이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 좋은 산을 그리 급하게 애써 짧은 시간만 즐기기보다 느긋하게 천천히 오래오래 걸어보는 건 어떠냐고 말을 건네고 싶었다. 나는 차로 빠르게 이동하고 산을 급히 오르며 시간을 적게 들이려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 남는 시간에 무얼 했냐고.

순천 한달살이는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조금 천천히 움직이니까 삶을 깊게 음미할 수 있고, 바로 옆에 삶을 함께 즐기는 이웃이 보였다. 순천이라 가능했을까? 순천이라 가능했다면 순천에 살고 싶다. 이미 순천에 사는 사람들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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