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다큐멘터리 《진달래산천》 조성봉 감독

진행 : 최성문 편집위원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된 말로 정규부대에 속하지 않는 무장대를 말한다. 빨치산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유격대(항일 빨치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제주 4·3항쟁 진압을 거부한 여수 주둔 제14연대 봉기군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분단거부, 평등 세상을 갈망했거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려고 들어왔거나 그들은 6·25전쟁 전후 산에서 대다수 죽었다. 정규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전협정에서도 거론되지 않은 채 총에 맞거나, 굶거나 얼어 죽어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70여 년이 지나도록 우리들 기억에서 금기의 역사가 되었다.
지난 16일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비트(빨치산들의 주거지, 비밀 아지트의 준말) 탐사 트레킹을 진행하고 있는 조성봉 감독을 남원 실상사 앞에 위치한 ‘지리산문예공장’에서 만났다.

 

《진달래산천》 내년 개봉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 중
이념 논쟁보다는 역사의 현장 기록에 충실 
비트 탐사를 통해 등사기, 탄피, 수통 등 다수의 유물 발굴

 

조성봉 감독
조성봉 감독

Q. 2006년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진달래산천》을 찍는다고 소문은 무성한데 아직 소식이 없어 직접 물어보고 싶어 불쑥 찾아왔습니다. 《진달래산천》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작업을 하다 보니까 나이도 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것 만들기보다 이왕 늦은 김에 제대로 만들어보자 그러다 보니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충하려면 벌써 정리했겠지만 명확하게 안 잡혀서, 그분이 아직 안 오셔서 헤매고 있는 듯합니다. 빨치산은 남북의 문제이며, 현재 진행 중인 역사입니다. 빨치산 이야기를 한국 사회에서 오롯이 담는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이번 영화는 촬영에 임해주신 분들이 목숨 걸었던 한순간을 다루는 것이기에 저 스스로가 조심스럽고, 제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했을 때 그분들로부터 저것은(작품) 조성봉 몫이라고 인정해 줄 만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목표는 6·25전쟁 70주년 올해를 개봉 목표로 삼았는데, 내년까지는 끝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남원 실상사 앞에 위치한 '지리산문예공장'
남원 실상사 앞에 위치한 '지리산문예공장'

Q. 빨치산 하면 이념적인 측면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레드 헌트》(1997년)도 찍은 경험도 있으신데, 이번에 촬영 중인 《진달래산천》에서는 어떤 점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15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헤매고 계시는지?

- 제가 다루고 싶은 점은 이념이 아닙니다. 대다수 빨치산이 살아왔던 삶을 담고 싶은 것입니다. 어차피 이념이나 이런 이야기들은 내레이션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목소리나 표정을 통해서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던 역사의 한순간을 그려내고 싶은데 그 작업이 쉽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도 365일 다 다르잖아요. 어쩌면 한 사람당 5분도 안 되는 영화의 시간에서 빨치산이라는 실존의 진실을 다 보여줘야 하는데 눈빛의 떨림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한 산에서 펼쳐진 사건이다 보니 지리산이라는 풍경을 제대로 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인터뷰만 가지고는 빨치산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습니다. 빨치산에게 산은, 지리산은, 대자연은 물과 물고기 같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지리산은 생존의 공간이자, 어머니 품이었습니다. 인터뷰 중심의 다큐멘터리는 이전에도 시도해 보았기에 이번에는 이 땅의 아픈 역사를 품었던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담고 싶습니다. 지리산뿐만 아니라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등 빨치산들이 활동했던 여러 공간을 담고자 합니다. 어떤 공간의 한 계절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잘 찍어서 예쁘게 만들 욕심에 끝이 없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좋은 그림이 날마다 잡히는 게 아니잖아요. 일 년에 한 장만 찍을 때도 있습니다.

 

빨치산 활동 경로를 설명하는 조성봉 감독
빨치산 활동 경로를 설명하는 조성봉 감독

Q. 지리산, 빨치산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가 제주 4·3항쟁, 여순10·19항쟁 진행 과정을 추적하는 역사 다큐멘터리의 소명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특별히 어떤 개인적 인연 때문입니까? 금기의 영역에 오랫동안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 제주4·3항쟁을 다룬 《레드 헌트》는 봉기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봉기했던 사람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말해 보려고 제주도 들어가는데 민간인 피해자들도 다 빨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다 보니까 도시에 있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지리산에 들어왔습니다. 일단은 술을 좋아하다 보니 건강도 악화되었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도시의 삶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것에 지치기도 했고, 지리산에 쉬러 온 것이었는데, 와서 살다 보니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요. 살려고 들어왔다가 빨치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제주에 머물면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다룬 《구럼비 : 바람이 분다》 촬영을 마치고 2015년에 제주도를 청산하고 지리산으로 완전히 옮겨왔습니다. 빨치산들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 빨치산 비트를 찾아다니는 트레킹 프로그램도 매월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래 이 작업에 매이다 보니 특별한 소명 의식이라기 보다는 인생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Q. 직접 비트 탐사를 하고 다시는데, 유골이라든지 당시 유물들을 직접 발굴하시는 경우도 있는지, 있다면 주로 비트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빨치산 비트 탐사 트레킹에 참여하려고 산행에 오는 사람들은 대략 20~25여 명입니다. 그중에는 실제 빨치산 경험을 가진 분들도 직접 함께하고 있습니다. 김영승(전남 영광 출신, 1950년 9월 28일 입산하여 1954년 2월 20일 백운산에서 생포) 영감님도 올해 86세인데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팀 내부에서도 이념 문제로 간혹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념 논쟁보다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작업에 충실히 하려고 합니다.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등 빨치산을 다룬 실록 소설, 국방부, 대학교 학술자료 등 가리지 않고 참고하여 이산 저산을 뒤지고 다닙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유물 찾기가 어렵지만, 등사기(간단한 인쇄기)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나주에 살던 영감님께서 책방을 하시다가 입산을 하셨는데, 산에서 등사기 필사를 해서 빨치산 신문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이분께서 살아계실 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리산 삼도봉까지 올라오셔서 지팡이로 반야봉 일대를 가리키며 수색해 보라며 하시기에 그 일대를 뒤진 적이 있습니다. 건전지, 모르핀 약병 등을 발견할 수 있었고, 박영발(전남도당 위원장) 비트 아래 폭포수 계곡에 산재한 호위대 비트에서 등사기를 발견했습니다. 그 등사기는 지금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있습니다. 숟가락, 수통, 탄피 같은 것은 지금도 많이 발굴하고 있습니다. 아직 비트에서는 유골을 발견한 적은 없습니다.

 

빨치산이 발행한 기관지 「승리의 길」
빨치산이 발행한 기관지 「승리의 길」

Q. 마지막으로 빨치산의 출발점인 여순10·19항쟁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동에 주둔한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 세력들이 지리산에 입산하면서 빨치산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감독님께서는 여순10·19항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 제주 4·3 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 연대장 김익렬이 1948년 4월 28일 무장대 대장 김달삼과 제주도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평화협상을 추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경 진압을 주도한 미 군정과 경찰에 의해 김익렬은 해임되었고,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대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제14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한 김익렬을 통해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사태의 본질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14연대 군인들은 남로당 그런 것을 떠나 제주도 진압 명령을 동족 학살로 인식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군인이니까 명령하면 무조건 가는 상황이 아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총부리를 제주로 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점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도중 빨치산의 전설 남부군에서 활동한 하수복이 올 1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빨치산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인한 대가를 치렀다. 묘 하나 없이 죽거나, 비전향 장기수로 감옥에서 수십 년 살기도 했다. 그 후손마저 연좌제로 고통을 겪거나 심지어 이름마저 숨긴 채 살아오고 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죽으면 그 죄를 묻지 않는 게 사람살이이건만, ‘빨갱이’라는 이념의 굴레를 씌워 70여 년이 지나도록 지리산에 묻혀둔 것은 아닌지 이젠 국가가 대답해야 한다. 역사는 고정불변의 사실이 아니다. 빨치산은 지금은 금기의 역사이지만 100년 후 변혁의 역사로, 통일의 전사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빨치산은 기억되어야 하며, 기록해야 할 것이다.

4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마치면서 돌아오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지리산 횡단 도로(남원~구례 천은사)를 타고 넘어왔다. 뱀사골, 달궁, 반선 마을, 노고단 거치면서 최소한 인간적 예의도 갖추지 못한 채 총 맞고, 굶고, 얼어서 죽어간 수많은 빨치산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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