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인1992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순천작가회의 회장, 광양중마초 교장
이상인1992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순천작가회의 회장, 광양중마초 교장

주말에 하는 일 중에 하나는 동천을 걷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느릿느릿 걷다보면 1주일간의 피로가 금세 풀리는 느낌이 든다. 출발하기 전에 살피는 것은 늘 하늘님의 표정이시다. 날씨가 좋으면 그만이지만 잔뜩 흐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작은 우산이라도 하나 챙겨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지만 아는 분들 대부분도 어느 공간에 있으면 편안한 느낌을 받아서인지 
자꾸 그 공간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고 한다. 주위의 풍경들과 새들과 꽃들이 계절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와 채워지고 다음 변화를 미리 생각해보면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나도 그 풍경 속의 하나인 동천 머리에서부터 걷기를 한다. 이 길은 이순신장군의 백
의종군로이기도 하다. 조선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전주 남원 구례 곡성을 지나와 순천을 지나가시면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일념 하나로 걸으시던 길이다. 이 길을 가신 이순신 장군은 장졸들과 군량미와 병기들을 모아 드디어 다시 전국 방방곡곡에 승전보를 전하셨다.

어느 강변이나 그러하듯이 순천 동천에도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고 봄이면 꽃들이 화창하게 며칠을 휘날리고 뜨거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작년 그 춥고 황량했던 겨울에 꽁꽁 언 얼음을 안고 지쳐 누운 강심을 바라보며 봄을 생각했던 그 장소에 다시 서 본다. 의자가 두 개 있고 벚나무 휘늘어진 가지 사이로 창백했던 강이 지금은 남실 남실거리며 붕어며 잉어, 피라미 떼를 토실토실하게 키워내고 있다. 폰에 들어있는 겨울 사진을 뒤적여 본다. 큰 돌멩이 몇 개를 가슴에 품고 아무 말 없이 겨울을 견디던 모습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번에는 지난봄에 벚꽃이 만발하던 모습의 사진을 열어본다. 강변엔 어린 연초록 풀들이 자라고 맑은 강물 위로 하염없이 꽃잎들이 휘날린다. 그리고 지금의 사진을 찍어서 저장하고 꺼내본다. 똑같은 장소에서 찍은 모습들이 시간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어린 시절의 나와 청소년 시절의 나 그리고 장년 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내 마음이 변하지 않고 이상하게도 한결같다는 느낌이 들듯이 겨울과 여름과 지금 찍어놓은 이 장소, 이 풍경의 마음도 그대로일 것만 같다. 동천의 마음은 한결 같을 것이다. 늘 푸른 하늘에 잠시 먹구름이 지나가고 천둥 번개가 드리웠다가 걷히면 다시 푸른 하늘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좀 더 걷다보면 순천교 아래를 지나게 된다. 일명 장대다리라고 하는 이 순천교와 양옆 제방은 여순사건 때 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여수에서 봉기하여 기차로 올라온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치열하게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20일 순천 경찰과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 우익 청년단원 수백 명이 봉기군을 저지하기 위해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화력이 우세한 봉기군에 격퇴 당하였다. 더욱이 광주에서 진압하러 내려온 4연대 지원 병력이 봉기군에 합류해 버림으로써 더욱 수세에 밀렸다
고 한다. 

결국 경찰의 상당수가 전투 중에 사망 또는 부상당하거나, 일부는 피신함으로써 순천읍내를 봉기군이 장악하였다. 이곳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본격적인 접전장소이자 봉기군이 순천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도 여순사건은 진행형이다. 제주4·3항쟁처럼 여순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동천 걷기의 종착지는 순천 아랫시장이다. 전국에 유명해진 덕분에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건봉국밥집에 앉아 순천 ‘나누우리’ 막걸리에 국밥 한 그릇을 말아먹는다. 동천과 함께 흘러온 게 두어 시간이다. 이렇게 잔잔하게 흐르는 동천을 따라 걷다보면 마음도 잔잔해진다. 그러나 그 잔잔한 수면 아래는 꽃피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뼈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기억해야 될 것들을 잊지 않고, 사랑해야할 것들을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도 동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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