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달이 차는 건지 기우는 건지 조각달이 돼서 허청 위에 떠 있었다.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후배와 나눈 통화 내용을 떠올리며 서성거렸다. 어제가 세월호 사고로 변을 당한 이들의 49재였다고 했다. 때마침 소쩍새가 울어댔고 대나무 사립문 옆의 뽕나무에서 오디가 툭툭 떨어졌다. 소쩍새는 뭘 알고 저리 처연하게 우는 걸까.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소쩍새의 울음은 이 세상이 아무리 썩어 자빠져도 그 어딘가에 진실은 살아 숨쉰다는 것을 절규하는 것 같다. 만일 내가 저 소쩍새의 울음을 시의 운율로 옮길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온 시인들 중 꽤 괜찮은 시인이 되리라. 

  뽕나무에서 떨어진 오디를 주워 벌써 오디술을 세 병이나 담갔다. 오디는 마당에 떨어져 굴러도 몸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가벼운 삶, 다 비운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게 깨우치려는 것일까. 불쌍하게 변을 당한 이들의 49재라는 것을 알고 하늘도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뿌린 것이었을까. 아, 서남쪽 바다를 향해 소주 한 잔이라도 따를 것을. 나는 되지도 않는 시 67편을 묶어 어느 출판사에 보내 놓고 괜히 우울해 있던 참이었다. 누군가 걸린 역병이 내가 걸린 고뿔만도 못하다는 것이었을까. 나도 참으로 뻔한 인간의 축에서 한 뼘도 못 벗어난 인간이었다. 

  거기다 오늘 지방 선거에 내가 찍은 사람들의 당락은 확인도 하지 않고 서울시장, 서울 교육감, 경기도지사, 인천시장 등의 개표 결과에만 일희일비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떤 힘이 나를 그 분별 없는 상태로 끌어가는 것일까. 그 분별없음이 우리를 아무리 저열한 수준으로 자리매김하여도 나는,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일까. 

  물론 지방선거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것은 서울 시장 자리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서울 인구가 얼마인가. 대한민국의 한 지자체인 도시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틀어쥐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차기 대권구도의 풍향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으므로 서울 시장 자리를 누가, 어느 당이 가져가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방자치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바로 내가 사는 동네의 시군구 의원, 기초단체장을 바로 내 손으로 뽑는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방송들은 접전이 예상되는 중요 광역단체장 선거의 추이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많은 유권자들도 자기 동네를 끌어갈 사람이 누가 될 것인가에는 관심을 덜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결과를 보니 이변이 생길 일도 없었다. 역시 그 사람, 또 그 사람이 다 가져가 버렸다.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수도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와 상상력은 역시 사표(死票)라는 허망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나의 상상력은 정치적 지형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순진한 것에 불과하고 말았다. 

  지방선거 개표 방송을 보면서 내가 관심을 기울인 곳은 경기도와 인천과 제주 이렇게 세 곳이었다. 그 곳은 전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곳이었다. 희생자를 가장 많이 낸 안산이 경기도이고, 세월호가 출항한 곳은 인천이었고, 세월호에 탄 학생들과 교사들과 일반탑승객들이 가고자 한 곳은 제주도였다. 세 곳 모두 여당인 새누리당 후보를 광역단체장으로 뽑아 주었다. 솔직히 나는 몹시 헷갈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경기도만큼은 새누리당 후보를 뽑아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박빙이기는 했지만 집권 여당의 후보를 뽑아주는 것은 안산이라는 거대 초상집을 품은 경기도조차 세월호의 슬픔을 잊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세월호의 충격으로 현정부와 대통령에게 쏟아질 비판과 응징을 보수적 유권자들이 뭉쳐 보호하려 했다는 말인가.

“발이 없는 사람을 보기 전에는 내게 신발이 없음을 슬퍼했다.” 언젠가 여행 중에 들른 어느 도시의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글귀였다. 누가 한 말인지 어떤 책에 나오는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발이 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거리를 걷는데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눈길을 주지 않고 제 신발만 챙긴다. 아니 발이 없는 사람들이 떼로 달려들어 제 신발을 뺏어갈 것을 염려하는지도 모른다. 

  소쩍새가 한밤중에만 우는 이유는 우리에게 타인이 겪는 슬픔을 잊지 말라는 당부인지도 모른다. 오디가 툭툭 떨어지면서도 생채기 하나 남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버리고 가벼운 영혼으로 살라는 계시인지도 모르겠다.

  전화기에 문자메시지 신호가 왔다. 친한 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일은 또 문상 가서 역시 문상 온 지인들과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깨어나지 않는 일상으로 복귀할까.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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