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
산수유가 지면 목련이 피고 지고 다음 동백이 진다. 허나 올해는 이런 차례가 사라졌다. 함께 아귀다툼하듯 니 먼저 나 먼저 동시에 꽃망울을 터트리더니, 이깟 한 철 여한 없다는 듯 후두둑 함께 다 져 버렸다.

작가 김훈은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린다."([자전거 여행] p.23)고 했다.

목련의 절정이 꽃 피기 전이라고! 동양학에서는 최고의 단계는 이후 내려갈 일만 남았으므로 그 직전을 기운의 절정으로 본다. 한 해 동안 풍우한설를 버티고 뿌리로부터 올린 최상의 기운이 응집된 때가 꽃 피기 직전이다. 이 기운을 약으로 쓴다. 신이라는 약재명으로 불리는 목련만이 아니다. 금은화도 정향도 그렇다. 삶도 그렇지 아니한가? 정상을 향해가는 여정은 힘차고 거침이 없다. 정상의 시절은 한껏 폼을 내긴 하지만 뒤꼍으로 가면 초라해진다. 이젠 내려가야 하는 두려움이 슬그머니 밀려오니 초조하다.

 
목련은 비루하게 꽃을 떨군다. 여인내 치맛자락처럼 흩날리며 화사하게 꽃과 이별하는 벚꽃과 다르고, 논개가 남강에 몸을 던지듯 붉은 마음 한꺼번에 뒤돌아보지 않고 통째로 툭 떨구어버리는 동백과도 다르다. 김훈은 치밀하게 이를 관찰한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자전거 여행] p.24)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에서 나카무라 진이치는 "명줄은 무슨 수를 쓰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품격이 된다. ... 죽기에는 암이 최고다.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주변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의무라 여기기 때문이다. 둘째, 비교적 마지막까지 의식이 맑은 상태니 의사표시를 하기에는 암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p.120)고 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하나라 했던가! 나의 몸 하나하나를 이루고 있는 세포도, 내 몸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피도 때맞춰 죽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암이듯, 살지 않고 죽는 것은 나의 몸 어디에도 자리 잡을 수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동어반복이기에, 만물이 생기에 가득 찬 이 찬란한 봄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생물처럼 인간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더욱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는 외부의 인공적 힘에 의존하기보다 노화의 자연적 과정에 순응하며 자신의 몸을 관조하는 자세가 유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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