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나는 달걀배달하는 농부 / 김계수 지음 / 나무를 심는 사람들 펴냄

아무 것이나 덮어놓고 맛있다고 하는 사람에겐 좋은 음식을 내놓는 식당을 물어봐서는 안 된다. 사람과 책의 경우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좋은 음식을 가리는 것과 같게 볼 수 없을 터이지만, 이 경우도 대체로 꼬장꼬장한 사람이 더 정확하게 판별한다. 좋은 책의 기준에 관한 한, 나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에게 최근에 좋아하는 책이 하나 생겼다. ‘나는 달걀배달하는 농부’라는 책이다. 얼핏 보기엔 전원수필이고 농사이야기인데, 그 속에는 매서운 문명비판이 들어있고, 하이데거의 철학이 펼쳐져 있다. 줄 바꾸기만 해놓으면 그대로 詩가 되는 구절도 심심찮게 눈에 띤다. 글쓴이는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살살 표현했지만, 현대인의 꾀죄죄하고 비루한 삶을 질타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나는 달걀배달하는 농부’는 두 가지 점에서 상투성을 깨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 가지는 글쓴이를 아는 사람이 이 책에 더 열광한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닭 뒷바라지 하느라 십 년 동안 여행 한 번 간 적이 없었다는 사람이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수려한 문장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기 하인에게도 영웅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고, 시인과 저자는 만나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도 있듯이,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좋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힘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타고난 사유능력을 갖춘 극소수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의 띠지에는 “<사람이 뭔데>의 전우익, <빌뱅이 언덕>의 권정생을 한데 만나는 즐거움”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앞의 두 책을 보태면 이 책이 나올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김계수는 앞의 두 분들과는 판이하다. 우선 근육, 치아의 모습도 다르고, 체력은 더 더욱 다르다. 경험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다. 이 책은 지금껏 우리가 보아왔던 글쟁이들과는 전혀 다른 종의 인간에 의해 쓰인 책이다.

내가 달걀배달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잘 묘사된 닭들의 한 살이 때문도 아니고, 글쓴이의 생태적 감수성 때문도 아니다. 이 책 속에는, 이제는 보기 드문 유형인 건강(健康)하고 강인(强忍)한 농부가 등장한다. 대지, 봄바람, 새싹, 수확, 찬 서리가 나오고, 심지어 살모사도 나온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가물해진 과거의 삶의 족적이 과장도 미화도 없이 담담하고 생생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띠지에는 또, “흙을 만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천생 농부가 보내는 땅의 노래”라고 적혀있는데 이 말도 틀렸다. 아무리 글쓴이의 글재주가 뛰어나다 한들, ‘땅의 노래’에서 나오는 울림을 흙냄새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단지 글쓴이의 세계를 상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큰 울림을 느꼈다 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 책의 진수에 다다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진수의 반만큼만 따라가는 것도 굉장한 수확이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도시민에게는 건강한 추억을, 현재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존감을 줄 것이다. 촌놈이었던 적이 없는 도시민에게 이 책은 그들이 겪어보지 않은 세계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줄 것이다. 속기 쉬운 어린 청춘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헛소리로 자신의 싱싱한 머리를 오염시키지 말고, 건강한 농부가 몸으로 느낀 삶의 이야기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윤철호/ 변호사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