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은 2004년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하였다. 현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순천대학교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평화고물상」은 1970년대 순천의 공마당을 배경으로 여순사건 피해자인 어른들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반공교육을 받는 11살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다.

삽화 김민주 (순천대학교 사진예술학과)
삽화 김민주 (순천대학교 사진예술학과)

양옆으로 땋은 갈래머리를 달랑거리며 나는 집에서 폴짝폴짝 뛰어나와 공마당에 선다. 엄마는 이 갈래머리를 뒷머리 중앙에 일직선으로 가르마를 내어 양쪽으로 높이 치오르게 묶은 후 다시 촘촘히 땋아 내렸다. 그 탓에 얼굴 목 등의 살갗이 위로 당겨 고개 움직임이 몹시 불편하다.

아침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오늘 따라 엄마는 유난스레 내 머리에 공을 들였다. 엄마가 가르마를 타는 동안 나는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하는 괘종시계 추를 쏘아보느라 눈알이 핑그르르 돌았다. 가르마 타기는 큰바늘이 1에서 3으로 넘어 가도록 계속 되었다. 오늘은 엄마가 직접 손뜨개질한 분홍빛 스웨터를 고르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거기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까지 했다. 엄마는 예쁘다. 작은 얼굴에 박혀있는 외꺼풀의 눈과 오똑한 코와 그리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 그것들은 따로 떼어놓고 하나하나 볼 때 더욱 사랑스럽다. 사람들은 엄마를 보며 참하고 예쁘다고 말하고 나를 보며 엄마를 쏘옥 빼박았네, 하고 말한다. 대신 엄마와는 다르게 당차 보인다고 한다. 그럴 때 엄마는 아니요, 착해요 하고 그들의 말을 수정한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에게는 착한 아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찬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나는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엄마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몇 번이고 머리를 묶고 푸는 것을 반복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났다.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또 한 마디의 말을 잊지 않았다.

"고물상 가지 말고. 그 반란군떼 득실대는 도적들 소굴 같은 곳."

목소리를 높이며 엄마가 말했다. 평소 엄마의 말소리는 나직하고 조용하다. 높이는 일도 낮추는 일도 없다. 엄마는 크게 기뻐하는 일도 화를 내는 일도 없다. 나는 반란군이라는 말을 할 때 엄마의 음성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할 때 때로는 높아지고 때로는 낮아졌으며 가끔씩은 웅얼거린다. 내가 혼이 날 때는 가끔 옷차림이 흐트러질 때인데 그럴 때 엄마는 말했다.

"옷이 그게 뭐야. 꼭 반란군 새끼 같이."

어쩌다 가끔 듣는 말이지만 그럴 때 엄마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엄마의 것 같지 않다. 그럴 때 나는 반란군이 북한 괴뢰군쯤 되는 모양이라고 상상한다. 세상에서 북한 괴뢰군만큼 무서운 것이 있을까. 그러니 대통령이 반공방첩을 이야기 하고 학교에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말한 이승복의 동상을 세우고 동네 담장마다 붉은 페인트로 멸공 혹은 반공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을 보면 북한 괴뢰군은 필시 뿔 몇 개쯤 달린 도깨비처럼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포스터를 보면 대부분 험악한 표정을 한 뿔 달린 도깨비가 날카로운 가시박힌 방망이를 들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1학년 때부터 올 4학년까지 현충일과 6.25가 들어있는 6월이 되면 공산당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를 물리치는 대통령이 얼마나 훌륭한지 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상을 받고는 하였다. 이번 호남예술제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전학을 오기 전의 시골학교 애국조회 내용을 담은 글이었다.

 

소설가.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소설 당선. 현 순천대학교 강사, 여순연구소 연구원
소설가.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소설 당선. 현 순천대학교 강사, 여순연구소 연구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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