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아 소설가
장편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경성을 쏘다> 외 다수

 

앳된 얼굴의 여자가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무릎을 꿇고 있다. 흰 저고리에 먹색치마를 입은 여자에게 돌쟁이 아기가 꼭 달라붙어 있다. 아기는 무엇을 본 것일까. 세상 태평해야 할 아기 얼굴이 공포로 얼어붙어 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저고리 밑 엄마의 젖을 찾고 있다. 그러나 아가야, 어미의 가슴은 더 이상 젖이 돌지 않는단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아버린 엄마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있다. 70년 세월을 건너 나의 망막에 비친 앳된 모습의 그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냉기가 훅, 끼친다.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나는 여순의 모든 걸 보아버린 것 같았다.  


저 돌쟁이가 자라 칠순의 노인으로 내 앞에 있다.  
죄 없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 총살하고 파묻을 때, 그렇게 모든 게 묻힐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총칼이 영원할 줄 알고, 욕망에 눈멀었을 테니. 그러나 이제는 당신들이 공포에 떨 차례다. 고작 돌쟁이였던 아이가, 영문도 모른 채 어미아비를 잃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돌멩이처럼 세상을 굴렀으나, 이제 그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으니까. 바닥을 박박 긴 이들은 더 이상 무서운 게 없다. 그것이 이들의 무기다. 그것이 역사란 것이다.   

 

▲ 『나 죄 없응께 괜찮을 거네』-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그러나 역사는 한없이 느려터져서, 사망자, 실종자, 부상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통계숫자는 비정하기만 하다. 그러나 통계 속 숫자 ‘1’, 그것은 하나의 우주다. ‘1’의 아버지, 어머니, ‘1’의 형과 누나, 오빠와 동생, 그리고 ‘1’의 아들과 딸들이 ‘1’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죽어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젖무덤의 감촉은 희미해졌으나 기억은 더욱 살아난다.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다. 그것이 사람이다. 


『나 죄 없응께 괜찮을 거네』는 여순 항쟁 유족들의 증언집이다. 어미아비 얼굴도 모른 채, 어미아비를 그리워하는 것조차 죄가 되었던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을까. 죄가 없으니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나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1’의 아들딸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참혹한 세월을 이제 겨우 눈곱만큼 펼쳐놓았다. 그들이 어색한 몸짓으로 순천대학교 강당 무대에 올라 말하는 걸 듣고 있는 내내, 죄스러웠다. 그들의 서러움을 헤아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들의 사무친 그리움에, 먹먹해졌다. 주책없이, 눈물만 흘렀다. 그러나, 눈물조차 부끄러웠다. 이제는 눈물을 거두고, 손을 내밀 차례다. 
 

이성아 소설가
장편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경성을 쏘다> 외 다수

 

▲ 이성아 소설가장편소설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경성을 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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