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농사가 한창일 때 우리 집 강아지들이 대나무로 짠 사립문을 넘어서 동네에 마실 다니는 것이 큰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 강아지들만 보면 질색하며 역정들을 내었다. 강아지들이 이제 막 농작물을 갈아 놓은 밭에 들어가서 밭을 헤쳐 놓을까 걱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평소에 말 한마디 없던 이웃집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우리 집 강아지 한 마리가 자신이 갈아놓은 무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그 할아버지한테 격한 역정을 들어야 했다.

그날 나는 나의 모든 힘을 다해 대나무 사립문을 보강하는 데 하루를 거의 다 소진해야 했다. 그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저물녘에 벗들과 막걸리를 마시러 마을 밖으로 나갔다. 한잔 기분 좋게 취한 나는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도달해 사립문을 보니 두 개의 문이 서로 맞닿은 부분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녀석들이 서로 힘을 합쳐 문 한쪽을 밀쳐대어 틈을 내놓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내 이 녀석들을! 하고서는 대빗자루로 강아지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중앙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세 마리 중 누가 대빗자루에 맞았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깨갱깽! 비명을 내면서 녀석들은 각자의 은신처로 피신했다. 그러고는 내가 간신히 진정할 때까지 녀석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숨을 죽이고 꼬리조차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나의 폭력 본능은 강아지 세 녀석에게 완전히 들통나고 말았다. 고백건대 나의 폭력 본능은 군대 생활로부터 왔다. 광주항쟁 직후인 1981년에 군에 입대한 나는 선임병들로부터 집중적인 폭력의 세례를 당해야 했다. 전남대를 다니다 왔다는 죄로 후임 시절의 군 시절은 거의 악몽에 가까운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탄약고 뒤에서, 위병소에서, 훈련장에서 폭력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는 나의 안면으로 날아와 작렬했다.

그리고 내가 작대기 세 개를 달고 나름 선임병 행세를 하게 됐을 때 나도 내 눈에서 불이 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의 매일 후임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내가 후임병 때 선임병들에게 당했던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한번은 중대장의 당번병이었던 이훈도 일병을 얼마나 팼는지 내 주먹이 오히려 부어버릴 정도였다. 당번병이었다는 이유로 이훈도 일병은 줄곧 내 눈 밖에 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자랑이라고 이런 고백을 늘어놓는 것일까.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말썽 많은 2013년이 가는 마지막 날이다. 나는 악몽과도 같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2014년 1월 1일 새벽에 일어나 화엄사 뒤로 해서 노고단까지 오를 작정이다. 그리고 별일이 없는 한 계속 이 산행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이 겨울 이른 새벽마다 깊은 산에 들어가 지난 일들은 깊이 반성하는 묵상의 시간을 갖고 싶다.

그간 나에게 대빗자루로 혼나야 했던 강아지들, 방 안에 침투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해야 했던 각종 곤충과 벌레들, 단지 내가 당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모진 기합을 받아야 했던 내 후임병들, 그 중 특히 나로부터 혹심한 기합과 매질을 당했던 이훈도 일병,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저런 술자리에서 나에게 당한 선후배들…

그들에게 용서를 빌고 마음으로부터 화해를 요청하고 싶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화해를 요청하고 그들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고 싶다.

그러면 분단 이후 남북 대결 상황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이 땅의 힘없는 백성들에게 폭력과 살육을 했던 과거를 고백하고 백성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것 아닌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우선 나부터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오늘밤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노고단에서의 묵상의 시간이 더욱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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