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라면2] 강범식 조합원 광양제철고 교장

 

난 ‘광화문 통 아이’ 출신이다. 재수를 하던 1976년 나는 공식적으로 얻은 ‘좌절감’과 ‘애매한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맘껏 놀자니 괜히 찜찜하여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던 고등학교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살았던 재수생에 해당했다.
버스를 타도 고등학생요금을 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학생 요금을 내기도 멋쩍었던 어정쩡한 신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중학교 때까지 그런대로 공부 좀 한다고 서울로 고등학교 유학을 온 밑바닥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도 한 때였다.

 

그러나 그 자신감만으로 버티며 공부하기에는 너무나 다채롭고 화려했던 광화문 통은 나를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생활해도 속박이 없었으니 그 동안 갇혀 있던 내 호기심과 결기가 청춘의 피를 만나 왕성하게 뿜어져 나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맞이한 여름. 같은 중학교 출신 재수 동지 두 명과 함께 바다에 놀러 가자는 얘기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지만 의기투합한 이 청춘들은 “재수생도 인간답게 살자”며 무모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도 버스가 아닌 배를 타고 가자고 했다. 동지들과 함께 처음으로 큰 배를 타고 느꼈던 그 해방의 바닷바람, 낯선 통쾌함은 내리쬐는 8월의 태양과 함께 충분히 찌들어있던 재수생의 몸을 한껏 부풀게 하였다.

 

별장에 짐을 풀고 이미 와있는 시커먼 청춘 다섯과 합류하였다. 다음날, 중천에 뜬 바닷가의 태양 볕에 뜨거워서 못 잘 정도로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우루루 달려 나간 바다. 뜻과 신분이 통하는 청춘 동지들이 여럿 모이니 온통 세상이 내 것 같은 즐거움으로 물놀이와 축구를 번갈아하며 배고파 쓰러지기 직전까지  참 신나게 놀았다.

 

 

드디어 라면이 익어 솥뚜껑을 열었을 때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과 향긋한 라면의 냄새, 그리고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누구의 제안이랄 것도 없이 유일한 식량인 라면을 끓이기로 하였다. 밑이 온통 숯검정인 시커먼 솥을 걸고 주변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를 장작 삼아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쏟아져도 불을 살리려 후후 바람을 서로 불어대며. 뜨거운 장작불과 작렬하는 태양볕과 훅훅 치밀어 오르는 모래사장의 열기에 웃통을 벗은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우리는 앞다투어 젓가락으로 라면을 떠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면서도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려 대충 씹고 꿀떡꿀떡 삼켰다. 이제 몸 안까지 열기로 가득해서 면을 다 먹고 국물을 퍼 마실 때는 들어간 국물만큼 땀이 쏟아졌다. 그래도 그 황홀한 맛과 포만감은 만리포 해수욕장 바닷물만큼 온 몸에 가득했다.

 

그랬다. 그 때 동지들과 뜨겁디 뜨겁게 먹었던 그 라면은 그간 쌓였던 재수생의 서러움과 한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린 내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훨훨 날아다니며 고뇌하던 재수생 시절, 나에게는 청춘의 라면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쉽고도 아름다운 청춘의 라면.

 

강범식 조합원
광양제철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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