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린 너무 몰랐다』(도올 김용옥, 통나무, 2019)

서평 『우린 너무 몰랐다』(도올 김용옥, 통나무, 2019)

 

1. 박학다식하기로 소문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무엇을 몰랐다고 그리 통탄하는가?
  도올 선생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순 반란”이라는 말을 뇌까렸다. 나는 “여순이 여수와 순천의 합성어라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반란”은 “여순의 빨갱이들이 무고한 양민을 대창으로 마구 찔러 죽인 사건”이라는 식의 관념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캐물어서는 아니 될 사건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지금도 이러한 의식의 대강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라는 사건의 전후 인과관계를 명료히 파악하고 출발해야 한다.”(111쪽) 


  책을 보면 우리가 너무 몰랐던 것은 여순사건만이 아니다. 책의 차례를 보자.     
제1장 프롤로그: 현대사가로의 여정, 제2장 대황제국 고려의 발견: 청주와 《직지심경》, 제3장 해방정국의 이해, 제4장 제주 4·3, 제5장 여순민중항쟁, * 제주 4·3-여순민중항쟁 연표 1943년-1955년.


  책 전체 내용을 보면, 해방정국과 제주 4·3 사건 그리고 여순민중항쟁을 다루고 있는 3·4·5장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1장의 구례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 이야기, 2장의 충주와 고려제국의 이야기도 우리가 몰랐던 것, 알아도 터무니없이 알고 지낸 것에 해당된다.)


  〈해방정국의 이해〉에서 도올 선생이 가장 주목한 점은 자생적 전국 조직인 여운형 주도하의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 와해된 점과 그 많은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냉전의 첫 시험장이 된 우리나라의 운명 그리고 그로 인한 남북분단이다. 다음〈제주 4·3〉에서 필자가 가장 통절한 심정으로 안타까워 한 점은 국가 폭력에 의해 3만이나 되는 양민이 희생된 사실이다. 곁들여 필자는 위기의 시기에 보인 제주도민의 결연한 저항정신과 국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일단의 군인들의 올곧은 양심을 기억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여순민중항쟁〉에서도 소제목 ‘거북선을 만든 여수인민, 그 후손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다니 여수민중항쟁 희생자 11,131명(1949년 11월 11일 발표)’에서 보듯 부당한 국가 폭력에 희생된 양민들에 대한 애도의 심정을 통절하게 토로한다. 또 하나 필자가 강조하고자 한 점은 여순사건은 반란이 아니라 부당한 국가 폭력에 대한 항쟁이라는 사실과 여순사건을 제주 4·3과의 연속선상에서 그리고 세계 냉전체제와 관련해서 파악한 사실이다.

 

2. 그럼 왜 그런 사실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고백합니다.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이 사건[여순사건]에 가려진 진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 모두가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사건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조차도 이미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한 시대정신의 인식체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념적인 회전”은 결코 “진실의 발견”일 수 없고 “궁극적 해탈”이 될 수 없습니다.”(102쪽) 그러니까 우리가 여순사건에 대해서 너무 모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국가권력에 의해서 사실이 은폐되고 억압당한 데 있다는 인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이란 국가권력의 통제 하에 구축된 정신, 즉 반공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국가권력이 장악한 시대정신은 이론의 여지없이 절대화되어 여론은 물론 언론과 종교 그리고 교육 현장을 장악하고 드디어 현실에 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관료사회는 항상적으로 시민들의 일상을 관리 감독하여 일상을 식민화한다. 시민들은 시대정신을 거스르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는 두려움 속에 일상을 살게 된다. 시민들의 자기검열과 더럽고 파렴치하고 폭력적인 것을 잊고 살려는 인간의 참본성이 작용하여 역사적 사실은 더욱 은폐된다. 허나 이를 어찌 소심하고 비겁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눈과 귀는 살아 있어 사태가 목에 차면 분연히 일어서지들 않던가.    


  
3. 왜 우리는 현대사를 알아야 하는가.
  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사의 확고한 시점이 없는 사상가는 역사를 바라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칸트나 헤겔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현대사의 뿌리와 그 구조를 바르게, 폭넓게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어떠한 세계를 나의 의식의 장으로 엮어갈 것인가에 대한 결구구조가 생겨나”(45쪽)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조부모와 부모의 눈물과 웃음이 내 몸에 문신처럼 아로 새겨진다. 그 문신이 기억하는 사연을 아는 일은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일이 된다. 단군 역사만을 공부한다고 해서 굴곡 많은 현대사를 산 우리 가족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전쟁의 신 마르스는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의 눈을 가리라 하고, 전쟁터를 떠날 때는 레테[망각]의 강을 건너도록 한다고 한다. 너무도 처참하고 잔혹했으니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가리고 잊게 한다고 해서 어찌 잊겠는가. 가해자나 살아남은 자들은 평생 수렁 같은 죄책감과 정신적 외상으로, 아니면 자기파괴적인 혐오와 뻔뻔한 자기합리화로 어두운 덤불 속을 헤매지 않던가.  


  이제 현대사의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용서와 화해의 길밖에 달리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사태의 진상이 백일하에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민간인 피해를 한갓 사건의 부수현상이라고 치부해버린다거나 빨갱이라는 음습한 신화 속에 묻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잖은가. 

 

4. 《우린 너무 몰랐다》의 글 맛
  《우린 너무 몰랐다》는 이른바 줄기뿌리(리좀)형 글쓰기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수많은 현대사 이야기들이, 나무형 글쓰기처럼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기보다는, 나무뿌리들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큰 그림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다 간혹 육담과 육두문자가 양념처럼 흩뿌려져 있어 읽는 재미를 한껏 북돋우고 있다. 그리고 글쓴이가 단순히 사건의 관찰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연기하는 몸짓이 글 마디마디에 배어 있어 역시 독서의 맛을 배가한다. 글은 글을 쓴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는 책이다. 


임성운
(순천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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