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생 라 면 1

 

  나의 고향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이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 시흥동과 독산동을 오갔었다.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독산동에 살던 때다. 겨울이었다. 부모님과 형과 나는 일요일에 산에 가기로 했다. 관악산이 가까워서 종종 갔었다. 근데 토요일에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늦게 오셨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늦게 일어나신 아버지는 미안하셨는지 뒷산이라도 가자고 하셨다. 뒷산은 관악산과 이어지는 삼성산 자락이었다.
  화가 나신 어머니는 안 간다고 하셨고, 형도 가기 싫다고 했지만, 나는 가겠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지가 좀 안쓰럽게 느껴져서 나라도 따라나서야겠다고 생각했었나보다. 아니면 지금 내가 이렇게 술을 좋아하게 될지, 훗날 나의 모습이 딱 그러할지 그때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단 둘이 눈 덮인 겨울 산에 갔다. 아이젠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우리가 목표로 한 낮은 산 정상에 도착했다. 한쪽은 우리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한쪽은 눈 덮인 삼성산과 관악산이 이어져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눈을 녹여 라면을 끓여주셨다. 라면 브랜드는 기억나지 않는다. 라면 봉지에서 나온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넣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동안 먹었던 라면 중 최고의 맛이었다. 눈 덮인 산 정상에는 아버지와 나 둘밖에 없었고, 눈을 녹여 끓인 라면의 맛은 황홀했다.
  산행은 힘들지 않았다. 우리는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서울대 앞으로 내려가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온 후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했다. 아버지께서 지갑을 놓고 오신 것이다. 한 푼도 안 가져오셨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따라왔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 집엔 전화도 없었다. 하긴 공중전화를 걸 동전도 없었다. 우리는 걸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두 시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었지만 산행 후라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앞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어두워진 후 집에 도착했다.
  집에 가서 어머니와 형한테 고생담을 늘어놓으며 억울한 마음을 달랬다. 그때의 라면이 인생 라면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눈 덮인 산에서 먹은 라면의 맛도 좋았지만, 그 후의 고생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생은 가장 오래 아버지와 단 둘이 걸었던 기억이며, 그 산행과 라면은 아버지와 단 둘이 함께 한 몇 안 되는 추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고, 아버지는 암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계신다.                        

박용하 조합원
(소나무 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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