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람 아직 멀었다』의 저자 송기득 선생을 만나다

▲ 『사람 아직 멀었다』의 저자 송기득 선생
  송기득 선생은 올해 89세로, 1932년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서 태어났다. 1948년 여수수산중학교(5년제) 2학년 때 여순사건(여순 항쟁)을 경험하였다. 목사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장래가 보장된 여수수산중학을 관두고 이듬해 순천매산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보이열 선교사의 권유(‘무식한 목사가 되지 말라’)로 신학대학 대신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1953). 1958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전임 조교로 교수의 길을 걷다가, 1962년 목포 한산촌(결핵환자 요양소) 촌장으로 15년 동안 환자를 돌보며, 여러 가지로 고군분투하다가 이곳을 떠나, 1985년 목원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99년에 은퇴하였다. 선생은 2001년 고향인 순천으로 낙향하여 후학들을 위해 잡지 <신학비평>을 사재를 털어 발간하며 여전히 냉철한 지적 성찰과 왕성한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지난 4월 23일.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를 듣고 싶어 박소정 선생, 이하윤 선생, 본 편집자는 선생을 만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1.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에서 여기 저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군요. 젊어서 몹시 앓은 결핵의 후유증인지 심한 두통과 불면증이 평생 따라다니고 있지만 잘 견디고 있습니다. 치통이 심한데 지금 뇌경색 증상이 있어 약을 먹고 있는데, 이 약 때문에 치과 치료를 못하고 있습니다. 치통을 생으로 앓고 있습니다. 먹는 재미는 사라진지 오래고 먹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매일 유동식으로 연명하고 있어요.  

2. 요즘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이나, 하시고 계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평생 해 오던 글쓰기를 작년 12월에 다 내려놓고 죽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새벽에 명상을 하면서 자기를 내려놓고 버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모든 욕망이나 바람을 나로부터 사라지게 해달라고 하지만 이 날까지 살아도 못하니까 이러고 있는 것이겠지요. 날마다 욕망이나 무엇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사라져 없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3.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많으나 오늘은 우리 지역 사회의 현안인 여순사건(여순항쟁)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여수수산중학교 2학년 학생으로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때의 정황을 간략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그때 중학교 2학년이 뭘 알겠어요. 여순 항쟁이 일어나기 전에 ‘백묵 투쟁’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때 여수의 모든 중학교에는 1등부터 5등까지의 학생들을 모아 지하모임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저도 성적이 좋아 그냥 들어가게 됐고, 하는 일이라곤 밤에 몰래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문구를 담벼락에 분필로 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근데 밤에 그것을 쓸 때마다 정말 겁이 나고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기독교에 빠져들고 있어서, 날마다 새벽 기도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잠깐 자고 일어나 다시 집에서 한참 먼 교회를 걸어서 기도회를 다니기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선배들에게 그만하겠다고 말하고 빠졌습니다. 물론 선배들도 순순히 놔 주었고요.
  여수에서 인민위원회 집회를 지켜봤습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연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이크 상태가 좋지 않아 무슨 말인지 들을 수 없었고 설령 듣는다 해도 어린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 여수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거리에 나온 것 같았고, 마치 큰잔치가 벌어진 것처럼 들썩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걸었고요. 여수역에서 서국민학교까지 시가행진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가난한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요. 후에 든 생각이지만 이런 구호들은 이데올로기적인 표현 보다는 가난한 여수 사람들의 소박한, 아니 어쩌면 절실한 소망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4. 당시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여수수산중학교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진압 이후에 계엄당국에서 말하기를 학생들이 약탈, 방화, 살인 행위를 했다고 하던데요. 목격하시거나 직접 들은 사실이 있었습니까?
  여수수산중학교 같은 경우 10월 24일 여수 입구 미평 협곡에서 진압군과 봉기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수산학교 학생들도 총을 들고 진압군과 싸웠습니다. 이때 1~2학년은 빠지고 3학년 이상 학생들만 참가하게 했기에 저는 현장에는 없었습니다. 그때 제게도 총을 주었다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거기에 없었기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겠지요. 학생들이 약탈하거나 방화를 하거나 우익 학생을 직접 처형하는 일은 들은 바 없고요. 그런 일은 저는 본적도 없었습니다.   

5. 당시 가족 분들이나 친구 중에 직접 피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나요?
  난리가 길어지자 상포항을 통해(그때는 해창만에 물이 있어 여수로 가는 연락선이 있었습니다) 고흥 길두리 집으로 갔습니다. 고향은 의외로 평온했습니다. 해방되던 해에 일본의 신사에 불을 질렀던 마을 청년들이 지서나 면을 차지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나와 친숙했던 교회 장로 한 분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나는 그 장로 집에 가서 여수에서 시가행진에 참여했던 것을 자랑삼아 늘어놓았습니다. 그 장로님도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집을 자주 놀려간 것은 장로님의 따님이 있었는데, 매우 예뼜습니다. 그 누나를 흠모하는 마음이 있어 자주 놀러갔습니다. 그러나 후에 여순사건이 진압되고 고흥에 군인들이 들어와 그 장로님과 가족들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집에 며칠 머물다가 다시 여수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날 여수 앞바다로 군함이 지나가면서 함포사격을 했는데 그걸 보았고요. 사람들이 놀라 무조건 뒷산으로 기어 올라갔어요. 어휴 먼저 엎드려야 하는데. 물론 저도 정신없이 뛰어 올라갔고요. 그 때 제 자취방이 여수 우수영 장군도 앞이라 군함에 있는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여수에 진압군들이 들어오자, 군인들이 학생들은 보이는 데로 총살했습니다. 저도 불안해서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한번은 돌산 지역으로 피했던 학생 둘이 장군도를 거쳐 우리 집 앞으로 헤엄쳐 와서 폐선 옆에 숨었는데 초소에 있던 군인들이 이를 발견하고 다짜고짜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저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아! 사람이 저렇게 죽는구나 했습니다. 그전에 저도 멋모르고 그 군인초소에 가까이 간 적이 있었는데, 초소 옆에 살고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군인들이 오기 전에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재빨리 돌아섰습니다. 그때 3초만 늦었더라도 죽을 뻔했습니다. 
  그 당시 온 시내가 피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참으로 살벌했지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때 큰집 형이 살해됐습니다. 여순항쟁에 가담도 안했는데 무참히 죽인 것입니다. 형은 수산학교를 그만 두고 의과대학에 가려고 공부하는 중이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형이었고, 나의 멘토였습니다. 형도 여느 똑똑한 학생들처럼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단지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죽일 이유는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어디까지 사람이고
어디까지 짐승인가

 

6. 선생님은 여순사건 이후 장래가 보장된 여수수산중을 그만두고 순천 매산중학교로 전학을 가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저의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집안 사정상 중학교를 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아버지가 농사일을 거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아버지 몰래 여수수산중학교에 원서를 내고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합격은 했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아시고 ‘좋은 학교’ 합격했다고 내심 기뻐하시면서도 입학금 마련에 걱정이 태산이었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마침내 빚을 얻을 수 있었고, 나는 그렇게도 바라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나의 진학은 하느님께서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데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제게 행운이 찾아왔는데요. 당시 인재가 귀한 때라 ‘수산인’을 어렸을 때부터 양성하자는 국가방침이 있었는데 성적이 좋은 제가 학교와 고향 수산협동조합에 추천을 받아 장학생이 되었습니다. 대학졸업 때까지 장학금이 나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버지는 고향에서 소문내기 바빴죠.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효도라는 것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내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달포 전인가? 여수읍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를 모시고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어느 날 설교의 주제가 “나는 셋째”였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둘째는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하고, 자신은 그 다음 셋째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그렇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온통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래 목사가 되자!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선 ‘믿는 학교’를 가는 것이다. ‘믿는 학교’라면 순천매산학교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학교나 집에서 난리가 낫죠. 아버지가 반대하셨고요. “아버지!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힘으로 공부해내겠습니다. 내가 장성해서라도 내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는 없는 자식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모진 말이었고, 내가 천벌을 받을 일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내게 그런 잔인한 대목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목사가 되면 무얼 해. 부모에게 그런 모진 일을 하고서”라는 자책이 들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7. 소년기에 겪으시고 경험한 여순사건이 후에 선생님의 삶이나 신학에 영향을 준 점이 있습니까? 당시에 벌어졌던 수많은 무고한 죽음과 잔인한 학살들. 결국 이것 역시 인간이 저지른 행위인데요. 왜 인간은 서슴없이 폭력성과 잔인함을 드러낼까요? 선생님은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시고 우리나라 ‘해방 신학 1세대’라고 일컬어지며, “인간에 대하여”, “사람다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성찰을 하신 걸로 압니다. 여순사건에서 벌어졌던 인간의 폭력성과 광기에 대해 신학자로서 철학자로서 한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한숨을 내쉬며)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요. 일제시대부터 일본 순사들이 하던 짓을 보고 어렸지만 반골정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해방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었다고 할까요? 여순항쟁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평생의 화두가 ‘사람’이란 무엇이고 사람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체를 다루는 학문을 ‘인간학’ 또는 ‘인간관’ 따위로 부른데, 사람은 학(學)이나 논(論)의 대상이 아니므로 인간관이라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인간관에서 사람을 묻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람 밖에서 사람을 묻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안에서 사람을 묻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동물입니다. 밥 먹고 똥 싸는 존재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동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망나니를 보면 “짐승만도 못하다”하고 혹평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순사건은 ‘짐승의 시간’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사람에 대해 실망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또 종족(민족) 중심에서는 사람의 존재를 그의 종족이나 민족에서 찾으려 하고 자기의 종족만이 사람이고 다른 종족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죠. 그릴피르저(F. Grillparzer)는 근대민족주의나 국가주의자를 가리켜 “인간주의로부터 국수주의로 넘어가면서 야수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또는 내편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사람(종족)을 죽이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에서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했던 짓들이지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역설적 존재이지요. 그러나 사람에게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회개하고 뉘우치는 능력이 있죠. 철학적으로 말하면 반성하는 능력이죠. 그것이 사람이란 어디까지 사람이고 어디까지 짐승인가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사람이 어디까지 사람이고, 어디까지 사람이 아니냐?라고 했던가요? 그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그뿐입니다.    

8. 인간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실례로 최근에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광주 5·18에 대해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되었다”(이종명 의원),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을 만들어내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김순례 의원), 5·18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남한에 내려와 지휘했다(지만원)고 주장하는 “지만원은 우리가 지켜야할 애국자다”(김진태 의원), 세월호 유족들에 대해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의 회쳐먹고, 찜쩌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차명진 전의원). “세월호를 그만 좀 우려 먹으라”(정진석 의원) 등등. 아무 거리낌 없이 독처럼 품어내는 말을 서슴없이 당당하게 내뱉고 있습니다. 이러는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인 간에 대한 예의’라든가 ‘사람다움’이란 것이 있기나 할까요. 답답합니다.
  아! 비감함이 드는군요. 정치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것이라고 일찍이 함석헌 선생님이 강조하셨고, 맹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통탄하고 슬픈 일입니다. 자유한국당 사람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시체를 좀비라고 하는데 언제까지 ‘반공 좀비’로 살아갈 것인지. 참으로 분노할 일입니다.


걸어 다니는 시체, 반공 좀비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9. 다시 지역 현안으로 돌아와서, 작년에 우리 지역에서 여순사건 70주년 맞아 희생자나 유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또한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각종 집회, 학술대회, 청와대 국민청원, 특별법 국회통과 촉구 등. 그리고 많은 언론들이 전과는 다르게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활동에 대해 평가해 주시지요? 또한 시민사회나 정부에 대해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요?
  감히 제가 평가할 위치에 있지는 않고요. 여기 계신 박소정 선생이나 이하윤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이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한마디 한다면 사람이란 사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저는 동학의 언어가 제일 좋아요. 해월 최시영 선생의 말에 ‘사인여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을 섬기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서에도 있습니다. 사람 받들기를 하느님처럼 받들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사람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치지 말고 계속가야 합니다. 저는 자의식, 나아가 사회·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망치고 사회도 역사도 함께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외에도 선생은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전후로 한국의 근대사 100년은 무고한 사람들(민중)의 피와 수난의 역사였다고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는 여기까지 발전해왔고 그것이 우리 민중의 위대함이라 하셨습니다. “인간 해방의 주역, 민중 해방의 주체는 민중 그 자신”이라고 했으며, “예수는 억압받고 소외된 민중의 대표이며 상징이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들을 민중(다중)이라고 생각합니다.” 등등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10. 장시간 동안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다음에도 뵙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집에 있었다면 생기를 잃고 까라져서 맨날 죽는 시늉을 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인터뷰 대담 정리_강용운
순천대 인문학술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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