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내 어릴 적 고향마을의 회관은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시설이었다.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반촌(班村)이었던 고향마을의 회관은 크고 번듯한 기와집이었고 화장실도 작은 기와집으로 선암사의 해우소처럼 똥오줌을 받아둔 커다란 통이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너른 회관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표고버섯 모양의 멋진 소나무가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마당가에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곧고 굵은 줄기를 뽐내는 전나무가 한 그루씩 서있어 마을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회관 입구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두레박 샘이 있었다. 저녁 지을 때쯤 마을 아낙들이 몰려와 저녁 준비에 쓸 물을 길어 담은 양동이를 또아리를 얹은 머리에 이고 양동이 밑동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한 손으로 훔쳐가며 집으로 돌아갔었다.
  하루해가 뉘엿해지면 회관애비는 군불을 지펴 회관방을 데웠다. 남정네들은 저녁을 먹은 후 대부분 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아버지도 저녁을 드시면 으레 담배쌈지와 짧은 곰방대를 챙겨 회관으로 향하셨다. 간혹 새끼줄을 꼬기 위해 볏짚을 옆구리에 끼고 가실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있어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무료한 저녁 시간을 달래면서 간혹 농사에 관한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여러 명이 필요한 농사일에 놉을 구하기도 하고, 토막잠을 자거나 부질없는 담소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막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를 소유하거나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마을 유지 몇 사람은 마을 회의가 있는 날 말고는 회관 출입을 하지 않았다.
  안주인이 없는 데다 잘 씻지도 않는 농사꾼들이 드나드는 회관방은 반들거리지도 깔끔하지 도 않아 이는 물론 벼룩이나 빈대 같은 기생충이 꼬이기도 했다. 벼룩은 이 만큼 흔치는 않았지만 한번 물리면 이보다 더 고약했다. 벼룩은 모든 동물을 통틀어 높이뛰기의 제왕이다. 녀석들은 제 키의 최소한 100배 이상을 튀어 오르기 때문에 잡기가 어려웠다. 빈대는 작고 납작한 게 진드기와 비슷한 모양인데 벼룩과는 달리 동작이 느려 대개 어른들이 잠자는 데 쓰는 목침의 갈라진 좁은 틈새 같은 곳에 끼어 있곤 해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빈대에 물리면 벼룩보다 더 고약해서 가려움증이 한 달 이상 이어졌던 것 같다. 오죽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싶다. 당시의 잡학서에 특정 식물을 태운 연기가 빈대를 쫒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벼룩은 민첩함으로 생존을 얻고 빈대는 그 굼뜸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당시의 농사에서는 벼농사가 으뜸이었다. 농기계가 도입되기 전에 벼농사는 모내기나 타작처럼 한꺼번에 많은 일손이 필요한 때가 있다. 이때는 농사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해야 했다. 한해 벼농사의 시작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시냇물을 막은 보를 손질하고 보에서 각각의 논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점검하는 일이다. 고향 동네에는 큰 보가 서넛 있었고 500미터가 넘는 수로를 통해 논에 물을 댔다. 이 일에는 그 보에 연결된 논을 가진 모든 농부들이 나와 일을 해야 했다. 그 일에 불참한 사람은 염치없는 사람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당사자는 그 해 벼농사가 끝날 때까지 이웃에 떳떳치 않았을 것이다.
  1969년엔가 큰 가뭄이 들어 벼농사를 망친 적이 있었다. 이듬해 마을에서는 총회를 열어 동네 뒤편 항상 물이 나는 논에 관정을 파기로 했다. 요즘에 관정은 한 사람이 기계로 굴착하고 파이프를 박아 하루나 이틀이면 끝낼 일이지만 당시에는 삽과 괭이로 열 길 이상을 파 내려가는 대역사였다. 지름이 10미터 쯤 되는 구덩이로 시작된 공사는 흙과 자갈을 지게나 들것으로 옮기기 위해 차츰 좁아져서 거대한 항아리 모양이 됐고, 거기에 커다란 콘크리트 관을 켜켜이 쌓아 올린 후 밖의 공간을 흙으로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워낙 큰 일이어서 온 동네 남자들이 다 동원되어 한 달 이상 걸렸던 것 같다. 지금부터 한 세대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공동체는 그렇게 펄펄 살아 있어 빈부를 가릴 것 없이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 김계수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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