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벌을 받아 답답하고 성이 나는 것을 억울(抑鬱)하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정쟁(政爭)에 휘말려 억울하게 유배생활을 하다 끝내 그 한(恨)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가 있다. 
  조위(曺偉,1454-1503)의 자는 오룡(五龍) 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자형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하였고, 1474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매계는 1492년 성종(成宗)의 명으로 스승의 문집을 찬집하였다. 이때 그는 점필재가 1457년 초(楚)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꿈꾸고는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을 풍자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집에 수록하였다. 1498년 유자광・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역모의 뜻이 있다고 연산군에게 고하고,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매계는 점필재의 문집을 찬집했다는 이유로, 그해 음력 9월 20일 평안도 의주(義州)로 유배되었다. 그 뒤 1500년 음력 5월 매계는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읍성 서문 밖에 거주하였다.

▲ 임청대비

  매계는 의주 유배 당시 규정(葵亭)을 지어 해바라기처럼 임금을 향한 충정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순천에 와서는 죄 없는 자신의 억울한 심사를 「만분가(萬憤歌)」에 담아 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매계는 서문 밖 가까이에 물이 맑은데다 노수까지 우거져 한여름에도 고요하고 상쾌한 옥천(玉川)의 풍광에 매료되었다. 비로소 매계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不憂不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지조를 굳건히 하는 것이 천명임을 깨닫고서, 공자와 맹자와 도연명을 배우고자 하였다. 
  공자는 물을 보며 “흘러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네”라고 하였다. 맹자는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을 보아야한다.”라고 하였고, “근본이 있는 것이 저 물과 같다.”라고도 하였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가에 다다라 시를 짓노라. 애오라지 자연의 변화를 따라 완전히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라고 하였다.
  매계는 지조를 굳건히 하여 옥천에서 도에 대한 성찰과 근본을 말한 성현의 가르침을 체득하면서 낙천지명의 삶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이 투영된 것이 바로 순천시 옥천동 옥천서원 인근의 옥천 가에 있었던 임청대(臨淸臺)이다.
  임청대는 매계가 1502년 음력 8월 하순에 완성하였다. 1564년 순천부사 이정(李楨) 및 승평사은으로 일컫는 배숙(裵璹)・정소(鄭沼)・허엄(許淹)・정사익(鄭思翊) 등이 복원하였고, 이정이 1565년 음력 8월 퇴계 이황의 글씨를 받아 임청대비(臨淸臺碑)와 비각(碑閣)을 완성하였다. 이후 중수는 1675년 순천부사 송정렴(宋挺濂)이 하였고, 또 1717년 가을에도 하였다. 그 뒤 점차 퇴락하여 임청대비만 남아 전하다가, 1971년 5월 도시정비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간 이동한 현재의 위치로 비를 옮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김현진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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