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유족 조선자의 삶

▲ 조선자 씨, 필자와 함께

  나 죄 없응께 괜찮을 거네

  ‘그녀’의 아버지 조영두는 여순사건 발발 당시 승주군 상사면 서정리 518번지에서 거주하였다. 1948년 11월 5일 마을에 14연대 군인 2명이 들어와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좌익단체 가입을 권유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손이 귀한 집의 아들이었다. 할머니는 외아들인 할아버지와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고, 2년 불공을 들인 끝에 아들을 낳았다. 조영두는 청년이 되어 해군에 지원, 군복무를 마치고 면서기로 근무 했다.
  그날 ‘그녀’의 아버지는 보리거름을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임신 4개월로, 뱃속에 ‘그녀’를 담고 있었다. 그때 확성기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 앞 논으로 모이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가 ‘왜 젊은 사람들을 다 나오라고 근다요’ 하니까, ‘이 냇물이 피바다가 될 거네’ 하면서, ‘춥네, 손 시런께 얼릉 들어가소, 나 죄 없응께 괜찮을 거네’ 하더래요. 그거시 마지막 말이었대요. 음력 시월 초닷새 날 잡혀 가가꼬, 다시 돌아오지 못한 거지요.”
  마을 앞 논에는 상사지서에서 나온 경찰과 진압군 4명이 와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마구잡이로 두들겨 팬 후 산사람들과 내통한 사람을 지적하라고 하였다. 손가락질을 당한 사람들은 지서로 연행되었다. 다 풀려 나왔으나 ‘그녀’의 아버지와 다른 한 사람은 경찰서로 넘겨졌다. 풀려나온 사람이, ‘그녀’의 가족들에게 지서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전해주었다. 절대 나는 그런 거 아니다, 억울하다를 외치다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고 실신을 했다고 했다. 다음날 온 식구가 순천경찰서로 갔고, 후문에서 거적으로 덮어놓은 조영두의 시신을 발견했다. 

25살 꽃나이 그 잘생긴 얼굴을 어디에 가서 보끄나

‘당신 아들이 산사람과 내통한 사람 아니요.’ 
‘그녀’의 할머니는 내 아들은 절대로 그런 적이 없다, 하며 맞섰다. 
“나가 지서에 끌려가서 매에 못이기고 고문에 못이겨 가꼬 그냥 예예 맞소 그랬으면 우리 식구 다 죽었으꺼여.”
할머니는 ‘그녀’가 11살 되던 해, 아홉 군데 선을 보인 끝에 ‘그녀’의 어머니를 개가시켰다. 할머니는 어린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을 쳤다. 
“시국을 잘못 만나 느그 아부지를 잃었다. 25살 꽃나이 그 잘생긴 얼굴을 어디에 가서 보끄나.” 
  할머니는 ‘그녀’를 키우면서 늘 며느리 눈치를 봤다. 며느리 몰래 쌀밥을 떠서 보리밥 속에다 넣고 깡깡 눌러 주었다. ‘그녀’는 늘 밭을 맸다. 16살 때쯤일까. 작은엄마가 얼마만큼을 떼어 놓고, 그걸 다 매라고 했다. ‘오녀름에 그 밭을 다 매자 땀때기가 뚜드러기같이 나붑디다.’ 그때는 그런 작은 엄마가 팥쥐 엄마 같았다. 세월이 지나 이 만큼 살아보니 그런 작은엄마가 고아원에 넣지 않고 키워준 것이, 비록 요상한 곳이지만 시집이라도 보내준 것이 고맙다. 
할머니는 고생하는 ‘그녀’가 안쓰러워 서울로 보냈다. 먼저 올라간 친구는 극장에서 껌팔이를 했는데, ‘그녀’는 숫기가 없어 식모살이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돌아왔다. 밭을 매는 게 낫지 엄마 같은 할머니 곁을 떠나서 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결혼을 한 후에도 며느리 몰래 쌀을 훔쳐서 보내주었다. 할머니는 ‘그녀’가 아이 셋을 낳는 것까지 지켜보다 나이 90을 넘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니그 엄마가 학교를 쳐다보고 얼마나 울던지 걸음을 못 걷고 가드라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시댁에서 남편 없이 ‘그녀’를 낳았을 때 대를 끊었다 하여 미역국도 못 얻어먹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전처가 남긴 딸 여섯이 있는 비단장사에게 개가했다. 어머니가 가던 날 친구가 전해 주었다. ‘니그 엄마가 학교를 쳐다보고 얼마나 울던지 걸음을 못 걷더라.’
“밥보가 밥을 안 묵드라네요. 장날 장사 나온 어머니를 보여주려고 할머니가 데꼬 가서는 ‘저 사람이 의붓아부지니까 납죽허니 절해야 쓴다’ 했는디, 둘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정이 뚝 떨어지데요.” 
  어머니도 개가하여 아이 셋을 낳고 살면서 ‘그녀’를 잊어버린 듯했다. 비단 장사를 하면서 잘 살았으나 ‘그녀’에게 쌀 한 되박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가난이 질겨서 나는 가난한 사람이다’ 하고 서운해 하지 않았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풍으로 떨어지자 그 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11년 동안 똥오줌 받아내며 보살폈소. 엄마 죽기 전에 나가 그랬소. ‘엄마 나를 낳을 때 3일을 돌려갖고 물팍 다 까졌다하등마, 나 이제 그 공 다 갚았네, 잉?’”

궤 낯바닥만한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라

  ‘그녀’, 조선자는 1949년 생으로 올해 71세이다. 3년 전 유족회에 들어와 부모님 명예회복을 위해 살고 있다. 
  ‘그녀’는 20살 때 결혼하여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다. 마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작은 아버지는 ‘궤 낯바닥만한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라’ 하며 연애도 못하게 했다. 좁은 마을에서 풍파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었다. 
  중매를 해서 결혼했다. 부모가 없으니 좋은 자리가 들어올 리 없었다. 중매쟁이가 가져온 사진 속 남자는 월남 참전 용사에 자전거포를 한다는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경찰관을 퇴직한 형님의 자전거포에서 그냥 왔다갔다하는 사람이었다.  
“시숙님 집에 얹혀 사는데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남편은 진짜로 가위도 바위다 하는 무식쟁이였어요. 나는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공부를 잘해서 5학년 때까지 우등상을 받았어요. 남편은 강짜를 놓고 허구헌 날 나를 뚜드러 팼어요. 배가 고파서 할머니가 있는 집으로 가버렸어요.
  부모가 없어 눈물 난 거, 일이 뒈서 눈물 난 거, 참말로 그것은 암 것도 아닙디다. 배고픈 께 그것 같이 눈물 난 설움은 없습디다.  
  남편이 쫓아와 강짜를 부려서 다시 따라 나왔어요. 누가 방을 하나 줘서 요상한 정제 방에서 살았어요. 남편은 똥구르마를 끌고, 나는 리아카를 끌며 배추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걸로 돈을 좀 벌어서 자전거방 하나 채려 줬드니 이 남편  33살에 복수가 차오릅디다. 나이 50에 저 세상 갔으니 17년을 병수발 했지요. 조금 더 살았어야 했는디 월남 참전자들 보상 받을 즈음에 죽었어요. 아갸아갸, 더른 놈의 세상을 살다 간 거지요. 오살나게도 맞았소, 근디 그 인간이 밉지 않습디다. 
  아버지 없이 험한 세상 살면서 그래도 이만허면 잘 살았소. 다만 자식들 공부 못시키고 지그들이 돈 벌어 공부한 거, 그것만 빼놓고.”

정미경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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