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해이다. 더구나 1919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그 3.1절이 곧 다가온다.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선열들을 추념하는 마음 한편에는 아직도 가시지 않는 일본의 만행이 되새겨진다. 일본은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일을 저질렀다. 순천의 환선정(喚仙亭)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환선정은 1544년 완공이후 사정(射亭)의 역할이자 순천부사의 휴식공간 및 승경 감상처였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에게 회자되는 선향(仙鄕) 순천의 대표 공간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사찰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을 반포하였다. 한편 어느 시대나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듯, 승려 이회광(李晦光)과 김현암(金玄庵)은 조선총독부보다 앞서 조선 불교를 일본의 불교인 조동종(曹洞宗)에 부속시키려 하였다. 당시 일본은 개항장과 도회지에 포교당을 세우고 조동종 포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송광사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은 1911년 1월에 글을 지어 극력 반대하였다.

▲ 1913년의 환선정(片岡議의『寶庫の全南』소재)

우연인지는 모르나 일본불교 조동종이 만연하려는 시대 흐름을 자연이 거부하게 된다. 선암사(仙巖寺) 경운(擎雲,1852-1936) 대종사의 행적 기록과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1835-1922)의 「환선정백련사기(喚仙亭白蓮社記)」를 참조하면, 1913년 여름에 환선정 앞 동천이 연못을 이룬 곳에 백련(白蓮)이 피어 맑은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환선정이 있는 그곳이 불지(佛地)의 인연이 있다고 여긴 송광사 주지 설월 용섭(雪月龍燮)과 선암사 주지 금봉 기림(錦峯基林,1869-1916)은 당시 순천군으로부터 환선정을 차입해 불상을 안치하여 포교당으로 만들었고, 또 뜻을 함께하는 승려와 일반인들이 모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다. 
요컨대 환선정은 군사훈련 장소의 사정(射亭)과 유가(儒家)의 문화공간에서 일제강점기 때 불가(佛家)의 공간으로 변천하였다. 이런 점을 가장 먼저 환선정 제영시로 남긴 이는 순천군수를 지낸 이병휘(李秉輝)이다. 

매화교 멀리 있고 물은 안개 핀 듯하며    죽도봉 푸르고 달은 반원이 되려 하네        한 번 떠난 신선은 소식마저도 끊겨        이름난 정자는 이로부터 절이 되었네        
매화교형수여연(梅花橋逈水如烟),
죽도봉청월욕현(竹島峰靑月欲弦).
일거란생소식단(一去鸞笙消息斷), 
명정자차속금선(名亭自此屬金仙).

‘금선(金仙)’은 금빛 나는 신선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가리킨다. 당나라 무종(武宗) 때 부처의 호를 대각금선(大覺金仙)이라 하였고, 송나라 휘종(徽宗) 때 석가를 금선(金仙)으로 고친 일이 있다. 이병휘는 동천에 안개 끼고 달이 떠 어쩌면 신선이 내려올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환선정에서 그곳이 원래 신선을 부르던 공간으로 이름났음을 상기하였다. 하지만 그런 역사가 끊어져 버린 아쉬움 속에, 부처가 앉아 있는 사찰로 변해버린 현실을 서술하고 있다.
송광사는 1921년 선암사에 환선정을 양도하였다. 이후 1945년까지 환선정의 역사는 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35년 서병규가 지금의 흥륜사 자리에 사정(射亭) 기능을 복원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192호(2018.10.25.)를 참조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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