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전짓불 앞의 방백」

여순10·19와 문학8

 

 소설 「전짓불 앞의 방백」에서 ‘전짓불’은 하나의 유사 불빛이다. 빛은 신이나 이성 혹은 진리의 말과 같은 인간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들의 상징이다. 그것은 세상을 밝히는 것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사회·정치·역사적 진실들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력이나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당위나 명분들이 폭력적으로 세상을 획일화하며 유사 불빛을 내쏘기도 한다. 
  이청준은 인간,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부당한 힘을 ‘전짓불’로 보며, 그에게 ‘전짓불’은 곧 ‘공포’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소설은 그 부당한 힘의 속성에 대한 고발과 그 앞에서 주눅 들고 공포에 떠는 주체들의 진술, 그들의 방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방백은 곧 작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그는 전짓불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강박적 부끄러움을 숙명처럼 지녔으며, 자신 역시 전짓불의 감시를 내재화한 채 내적 검열을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방백’은 문제적 대상과 직접 부딪히며 나누는 ‘대화’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확신을 위한 자기와의 대화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는 들을 것을 상정한 말하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문체는 그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생활양식은 물론 생각마저 '국민'으로 획일화하려는 국가권력과 반공과 경제 계발을 당위로 내세워 국민을 통제하고 규제한 부당한 정치권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과 규율, 감시와 폭력, 발전과 욕망 등은 하나의 전짓불이 되어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면서, 누구도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엄두를 낼 수 없게 억압한다. 
또 어쩌면 그것이 유사불빛이라 해도, 당장의 어둠을 거두는 밝음이라는 선한 명분 뒤에 가려져 있다는 점과 누군가에게는 유효할 수 있다는 효용성을 주장할 때의 곤혹스러움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사불빛인 전짓불은 생성과 결실의 따사로운 빛과는 거리가 멀다. 삼라만상의 보편의 생명성과 각양각색의 차이들을 온 몸으로 느끼고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빛이 아니라, 전짓불은 밝음과 어두움의 이쪽과 저쪽 경계만을 뚜렷하게 가르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의 칼날이다. 
  그 편 가르기의 칼날이 지나간 역사적 상처를 여전히 고스란히 안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치유와 생명의 밝은 봄 햇살이 가득 비춰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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