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박항래 의사의 판결문. ‘박항래의 만세소리에 연자루 부근에 있던 군중 수백 명이 일시에 성문 아래로 몰려들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라고 적혀있다.

1919년 3월 2일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고 시작하는 <3‧1독립선언서> 35장이 천도교 순천 교구에 도착했다. 이 중 일부는 여수·광양·구례 등 인접 지역으로 보내졌고 일부는 천도교 교인 강영무가 군청·면사무소·헌병분견소 앞 게시판과 동·서·남·북 사대문에 부착했다.
 이를 시작으로 3월 16일 오후 2시경 순천 난봉산에서 기독교 청년회원 등 수백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일제의 저지로 해산하고 5명이 검거되었다. 4월 7일 오후 1시 지금의 남문다리에 위치했던 연자루에서 박항래 의사가 ‘독립운동만세’를 외치니 수백 명의 군중이 동참했다. 박항래 의사는 일본 헌병에 연행되었고 그해 11월 3일 고문으로 옥중 순절하였다. 이어 4월 9일과 14일에는 낙안읍성 인근의 신기리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벌교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해 19명이 검거되었고, 4월 13일 낙안읍성 서문 밖에서는 150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왼쪽부터 순천지역 3·1운동에 참여한 안덕환·오영태·안규진

 당시 순천의 독립만세운동의 규모와 피해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다만 1919년 12월 31일 일본 헌병대 사령부 자료에 따르면 순천에서 3‧1운동으로 검거된 사람은 58명이고 이 명단 중 26명이 실형에 처했다고 한다. 당시 순천의 경우 구한말의 활발한 의병 활동으로 인해 주도세력이 많지 않았고 사전에 군대를 충원하는 등 일제의 치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3‧1절 100주년을 맞는 일부 지자체의 사업을 보면 광복절과 착각하는 것 같다. 3‧1운동은 기쁨과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독립을 바라는 피로 쓴 처절한 항쟁의 역사다. 3‧1운동으로 전국에서 7,500명이 살해당했고 16,000명이 부상했으며 46,000명이 검거돼 8,000명이 유죄를 받았다. 3‧1운동이 주는 역사적 교훈은 불의에 대항하는 저항정신과 민족사에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또한 3‧1운동은 반제 독립운동의 모습과 함께 반봉건 민주주의를 외치며 민주공화제의 시작을 알리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태동이라는 점도 100주년을 맞는 올해 놓쳐서는 안 될 화두이다. 
 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순천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와 재정리. 둘째 친일잔재의 청산. 셋째 독립운동을 기리고 계승하는 동시에  나아가 민주주의와 통일을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종합적으로 수행할 기구가 필요한데 연구와 전시를 결합한 물리적 공간에 향토사학자, 전문가, 시민단체가 결합한 형태의 가칭 ‘순천근현대사박물관’이면 좋겠다.
 유대인의 정규 교육과정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이 의무이다. 비참한 학살의 현장을 견학 후 인솔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통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다. 유대인이 세계최고의 부강을 자랑하면서도 전시에는 이스라엘로 가는 모든 비행기표가 매진이 되는 이유엔 이런 역사교육이 밑바탕 되어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설문 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냐는 질문에 젊은 층의 10%만이 참전하겠다고 응답했다.
 3‧1운동 100주년. 우리는 어떤 역사를 가르칠 것인가? 공무원과 군인을 동원한 플래시몹도 좋고 동상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으로 아픔의 역사를 대면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는 공간을 준비해가면 어떨까? ‘순천근현대사박물관’을 만들어 아픔의 역사를 차곡차곡 담자. 그리고 촛불로 이어진 저항의 정신도 담아가자. 우리의 후대는 이 박물관을 통해 지역의 역사를 깊이 돌아보고 더욱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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