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기

순천시는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최근에 문득 내가 한 해에 벌어들인 소득과 소비한 화석연료의 양을 비교해보게 되었다. 배달용 차량에 쓰이는 LPG를 매주 50리터씩 1년에 2,500리터, 여기에 트럭과 여러 농기계에 들어간 경유와 휘발유를 합쳐 대략 3,000에서 3,500리터 정도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순수익 1만원을 얻는 데 화석연료를 1리터씩 쓴 셈이다. 내 농사가 배달을 필수로 하기 때문에 연료를 남보다 더 쓰기는 하지만 대다수 젊은(?) 농부들은 차량을 승용과 작업용으로 두 대씩 소유하고 있고, 농기계를 나보다 더 많이 쓴다는 것을 감안하면 화석연료의 소모량은 우리 집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소농의 생산 활동조차 지구온난화에 이 만큼 기여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소비는 기업이 생산해서 포장, 운송한 것을 구입해서 쓰는 것이 보편적이다. 끼니조차 대부분 외식이나 배달로 해결하는 세태에서 자급은 옛 일이 되었다. 라면 한 봉지를 생산하는 데 자원이 얼마나 쓰이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끓여 먹자면 비닐 봉지가 3개 이상 나오고 이는 미세 플라스틱으로 버려진다. 따라서 오늘날 자급자족이 아닌 모든 소비는 생태적인 의미에서 범죄적이라 해야 한다. ‘범죄적’이란 형법상 범죄로 규정되어 있지 않을 뿐 생태적으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사실상 범죄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나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노후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현재와 같은 건강 상태가 이어질 거라는 부질없는 희망과 더불어 장차 국민연금을 국가가 지급 보증하는 데 대한 의구심도 있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느님은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여주는데, 너희를 굶기겠느냐? 들의 꽃들을 저렇듯 아름답게 꾸며주는데, 너희를 헐벗게 하겠느냐?’고 한 구절이 더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느님은 새들을 더 이상 먹이지 못한다. 해안에 떠밀려온 고래의 사체에서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오고 얼음이 녹아버린 바다에서 북극곰은 먹이를 찾지 못하고 굶주린다. 곤충들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데, 꽃들은 언제까지 계속 피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느즈막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국민연금을 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우리 성당의 사목회 연수에서는 ‘가난’을 주제로 토론이 있었다. 부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신앙적 관념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을 부의 소유자가 아닌 (위탁받은) 관리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는 부의 관리자가 실질적인 소유자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첫 번째 가르침이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은 의미가 모호해서 여러 해석을 낳는다. 이를 ‘진리를 찾지 못해 갈망하는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꽤 억지스럽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로 되어 있어 뜻이 명확하다. ‘마음’은 기독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포섭하려는 의도로 나중에 삽입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예수 산상설교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 가난한 삶을 칭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가지 생각 모두 절제된 소비를 전제할 뿐 부 자체를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칭찬받았을지 모르나 오늘날 임박한 기후적 재난 앞에서 보면 핵심을 크게 벗어나 있다. 생산의 절제, 즉 부의 취득을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적 위기는 불요불급한 소비에도 원인이 있지만 절제되지 않은 생산, 즉 부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생산 활동을 절제한다는 것은 가난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소비 생활의 모토인 풍요와 편리를 포기하고 검소하고 소박하며 자급을 최대화한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것은 불편과 결핍을 감내해야 할 일이기에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환경적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현대인 모두가 기꺼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다. 사실 그 십자가는 가능하다면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본연의 건강한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통해 감성은 풍부해지고 감각은 예민해질 것이며, 몸은 민첩하고 동작은 능숙해짐으로써 뜻밖의 즐거움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김계수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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