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외 지역의 사례에서 배운 것들

▲ (사)숙의민주주의 환경연구소
소장 장용창

순천에서 쓰레기 관리 관련해서 공론화 작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광장신문 편집위원회에서 저에게 공론화에 대한 시론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처음엔 순천시 사례에 대한 논평을 하려고 관련 자료를 조금 살펴봤습니다. 자료를 조금 살펴본 후 이 주제를 포기했습니다. 순천시에서 이루어진 공론화 과정에 제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지역 사례에서 제가 배운 것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공론화 대상 이슈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다루었던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엄청 복잡했습니다. 제주의 영리병원, 창원의 해양신도시, 광주의 지하철 등을 보면 모두가 의료 분야, 토목 건설 분야 등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것들이었습니다. 경남 김해의 소각장 증설 문제의 경우도 들여다보면 환경공학적인 이슈가 아주 복잡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들을 일반시민들이 이해하고 판단하기엔 아주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슈들을 공론화라는 과정으로 결론을 내리다보니 문제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공론화 과정을 주최한 지자체 등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공론화 과정에서 결정된 것을 지자체가 번복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이럴 거면 뭐하러 공론화 했나?’라는 비판이 많이 쏟아졌습니다. 

2. 국민참여재판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국민참여재판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의아해하지만, 공론화 작업을 많이 했던 선진국에선 국민참여재판도 공론화의 중요한 한 사례로 간주합니다. 국민참여재판의 사례를 본받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습니다. 
(1)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단의 역할이 구별되어 있다.
판사: 재판의 공정한 과정 관리
검사: 원고의 입장 대변
변호사: 피고의 입장 대변
배심원단: 문제에 대한 최종 판단
국민참여재판에선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단의 역할이 명확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특히 일반 국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해당 문제의 당사자들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인데, 결국 판단은 배심원단이 내립니다. 그런데, 한국의 공론화 과정에선 이런 역할 구별이 제대로 안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지자체가 어떤 이슈에 대해 한쪽편 입장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검사가 변호사 역할까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국민참여재판에선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증거들을 제시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공론화 과정에선 서로 경쟁적으로 증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2) 증거 채택과 변론 과정의 공정성이 지켜진다.
국민참여재판에선 증거 채택과 변론 과정의 공정성이 매우 잘 지켜집니다. 그래서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 소송의 절차를 세세하게 규정한 법이 있을 정도입니다. 판사는 이런 절차법에 의거하여 어떤 증거를 채택할지 말지, 어떤 증인을 채택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결과의 공정성을 위해서 우리는 과정의 공정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공론화 과정의 경우 이런 과정이 엉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지자체가 한쪽 입장을 가지고 공론화를 시작한 경우,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증거들만을 채택해서 자료집에 넣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3) 배심원단의 수가 적은 대신 심의를 깊이 한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은 5 내지 9명입니다. 그래서 숫자가 적은 만큼 해당 이슈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있게 고민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공론화 과정에선 참가한 시민이 적게는 100명, 많게는 500명까지 많습니다. 문제를 깊이 있게, 책임감 있게 고민하기엔 너무 많을 수도 있습니다. 


3. 결론: 공론조사 외의 다른 숙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을 휩쓸었던 공론화 모델은 공론조사였습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언론학과의 제임스피시킨 교수가 개발한 Deliberative Polling (델리버러팁 폴링, 숙의형 여론조사)를 한국의 어느 학자가 <공론 조사>라고 번역하여 한국에 퍼졌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모델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실시한 이후, 지자체들은 이 모델을 사용하면 정치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모양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공론조사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국민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의사 결정 과정을 개발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두 해 동안 공론화가 그렇게 많이 진행되었는데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공론조사 외의 다른 숙의 모델을 고려하고 개발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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