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문화공간 산책 09]

동천 제방의 지금 모습은 1962년 8월의 폭우 피해 이후에 축조되었고, 봄철이면 벚꽃의 향연을 즐기는 상춘객들로 북적인다. 예전의 동천 모습은 읍성 동문 밖에 영선각(迎仙閣)을 포함한 환선정이 있었고, 배가 드나들었으며, 호수모양을 하고 있어 뱃놀이[船遊]가 행해졌고, 1871년 동천 가운데에 우선정(遇仙亭)도 축조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동천은 유상(遊賞)과 흥취의 공간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동천과 환선정이 어우러진 공간에서의 뱃놀이는 앞 호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생과 악공을 동반한 질탕한 취흥의 유흥도 있지만, 지인들과 풍류를 즐기거나 홀로 음풍농월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저물녘 방주로 가 놀잇배에 오르니        
좌중의 빈객은 모두 현인들이네        
몸은 아득히 무하향 밖에서 노닐고        
마음은 아득한 태고의 앞에 있네        
들물은 바다로 흘러 큰 물결 거세고        
버들꽃 눈처럼 저녁 바람에 흩날리네        
봉래산 신선을 그대는 말하지 말라        
인간세상의 맑은 풍경 속 내가 신선일세        
晩向芳洲上彩船(만향방주상채선), 座中賓客摠群賢(좌중빈객총군현).
身遊縹渺無何外(신유표묘무하외), 心在鴻荒太古前(심재홍황태고전).
野水通潮鯨浪急(야수통조경랑급), 楊花如雪夕風牽(양화여설석풍견)
蓬萊仙子君休說(봉래선자군휴설), 淸景人間我是仙(청경인간아시선).

▲ 유운홍(劉運弘) 작-청산만리일고주(靑山萬里一孤舟)

이는 순천지역민 조시일(趙時一,1606-?)의 「환선정차운」이란 시이다. 그의 자는 자건(子健), 호는 준회(遵晦), 본관은 옥천(玉川[순창])이다. 163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3년 옥천서원 중수에 참여하였다.
무하향(無何鄕)은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이다.  『장자』 「소요유」에 “지금 그대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쓸모없다고 걱정하면서,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곳의 광막한 들판에 심어 두고서 하릴없이 그 곁을 서성이거나 그 밑에 누워서 소요해 볼 생각은 하지 않는가?”라고 한 데서 나왔다. 즉 ‘무하향’은 유무(有無)・시비(是非) 등 세속의 대립적이고 번다함이 사라진 허무자연의 세계를 뜻한다. 동천이 주변의 난봉산・봉화산・인제산・삼산[圓山] 등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광을 선경(仙境)으로 표현하기 위해 차용한 말이다. 
버들개지[楊花(양화)]가 눈처럼 하얗게 날리는 늦봄 어느 날, 난봉산 너머로 해가 지며 서쪽 하늘과 동천의 수면은 노을빛으로 물든다. 그 속으로 유유히 물결 따라 떠가는 배와 찬연한 자연의 운치를 지기(知己)와 함께 담소와 웃음으로 즐기는 모습은 그림이 따로 없다. 조시일은 자신이 완상하고 있는 동천 주변의 맑은 풍경[淸景]을 무하향에 견주며 선경(仙境)으로 인식하였다. 물론 이런 인식은 신선을 부르는 정자란 뜻의 ‘환선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조시일은 인간세상 속 동천이 선계(仙界)이고 그곳에서 노니는 자신이 바로 신선이라 여기기 때문에, 굳이 신선이 사는 봉래산은 들먹일 필요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탈속의 흥취를 만끽하는 뱃놀이[船遊]다. 이러한 선인들의 정취를 오늘날 동천에서 체험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현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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