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어느새 들판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잿빛으로 변해간다. 띄엄띄엄 배추와 무, 갓 등 김장용 푸성귀들과 월동 작물로 심어놓은 마늘과 양파 정도만 남아 갈빛 일색의 단조로움을 덜어내고 있을 뿐이다. 보잘 것 없이 적은 농사에도 내내 바삐 움직이던 할머니들은 볕이 좋은 한낮에 콩이나 팥을 마당에 들고 나와 펼쳐두고 벌레 먹은 것들을 추려내며 마냥 한가롭다. 김장을 하고 메주를 쑤고 고추장만 담그고 나면 당신들의 올해 수고도 끝이다.
  입춘 무렵 당찬 계획과 기대로 시작했던 내 농사의 성적은 초라하다 못해 처참하다. 봄 감자는 밑거름을 잘못 놓아 싹도 내밀지 못하고 땅 속에서 썩어버려 비싼 종자대만 날렸다. 대농들은 1톤 트럭에 두 개 정도 실을 수 있는 커다란 톤백 주머니에 벼를 가득 싣고 방아를 찧거나 정부와 농협의 수매에 내놓고 있는데, 내 벼농사는 피사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수확도 적고 피투성이인데다 동네 앞 논 한 배미는 피 때문에 수확을 포기해야 했다.
  밭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아내가 다치는 바람에 콩이나 들깨 같은 잡곡 농사는 아예 파종도 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농사를 포기한 이웃 노인이 지으라고 빌려준 밭은 잡초가 가득해 바람 쐬러 나온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민망했다. 야심차게 600주를 심은 고추밭도 손길이 가지 않아 풀이 우거져 풋고추 하나 건지지 못했다.
  11월 초순이면 끝나야 할 마늘과 양파도 모종 정식을 이제야 하는 바람에 연약한 뿌리로 겨우내 언 땅에서 제대로 버텨낼지 걱정이다. 제 때에 심은 다른 사람의 마늘과 양파는 이파리가 제법 자라 너풀거린다. 김장 배추도 정식이 늦은데다 한창 생육이 왕성할 10월 하순에 기온이 낮아 결구가 제대로 된 것이 없어 절임배추 주문을 받아두고 미음만 졸이고 있다. 남들은 한 손으로는 들어 올릴 수도 없을 만큼 굵은 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올해 농사를 지어 얻은 소득이란 감자 대신 심은 봄배추, 결실이 부실해 대부분 즙을 내서 판매한 양파, 아직 판매되지 않은 쌀 정도뿐이라 닭 농사가 없었다면 보릿고개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귀농한 이래 최악의 성적이다. 며칠 전 아내가 농사를 그렇게 지었다고 밥상머리에서 볼멘소리를 한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나름대로 고단했고 애썼다는 생각에 아내의 퉁사니는 서운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농사꾼으로서 자부심도 사라지고 쌓여가는 건 빈 술병뿐이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대책이 절실하다.
  가축 농사에서는 밝은 눈이 필요하고 작물 농사는 때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내 농사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때를 놓친 데 있다. 봄에 양파와 배추를 수확해서 선별하고 판매하느라 논에 피사리가 늦어지고 밭을 돌볼 시간을 얻지 못해 잡곡 파종을 못하게 되고, 그 여파로 김장 채소도 정식이 늦어졌다. 양파도 면적을 작년보다 거의 두 배로 늘리는 바람에 밭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정식이 연쇄적으로 늦어지게 된 것이다. 밭농사가 한창인 때에 아내가 다친 탓에 닭 농사에서 아내가 하던 일까지 해야 했던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5천 평이 넘는 농사가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다.
  지금의 농사 규모는 닭 농사를 하지 않는다면 혼자서도 그런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일감이 많을 때에 밖에서 일손을 사 오거나 기계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런데 나는 생태 농업이라는 이상을 쫓아 기계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혼자 일하는 것을 즐기는 탓에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들보다 시간이 배로 걸리기 때문에 일이 뒤쳐질 수밖에 없다.
  답은 어렵지 않다. 닭 농사를 포기하거나 농사 규모를 획기적으로 줄이거나 그게 싫다면 기계와 외부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닭 농사를 포기하고 생태 농업의 이상을 지키려면 현재의 소비 수준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한다. 가능한 일일까. 인류 절멸이 걱정되는 환경 위기 속에서 답은 명확하나 실행할 용기는 없다. 전에 천주교 교리 교육을 받던 때 수녀님이 당신의 십자가는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십자가를 단순히 고통의 의미로만 받아들여 그런 건 없다고 답했는데, 이제 나에게,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가 무엇인지 점차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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