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날, 남편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온 몸에 기운이 쑥 빠져버린 탓인지 휘청거리며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우리는 병원 근처 식당으로 들어섰고, 둘이서 비빔밥을 시켰다.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가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탤런트이면서 어느 국회의원 후보 부인이다. 화사하고 당당한 그녀와 달리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머리를 조아린 채 밥을 몇 술 뜨는 나에게
“밥이 넘어가?”
기운이 하나도 없이 말을 건넨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편은 숟가락 들 힘도 없는 것처럼 앉아 있다. 그런 남편 앞에서 암이라는 말에 압도당하여 미처 남편 마음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로봇처럼 밥을 입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우리 부부가 말이 없는 편이라 평소에도 대화가 별로 없이 그럭저럭 지냈는데, 생전 처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치니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더욱 더 아무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차마 떠올리지 못한 말이 내 목 줄기 어디쯤에 들러붙어 있다.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그랬는데……’

아픈 남편 옆에서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방에서 나와 식구들 몰래 몇 시간 씩 울곤 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남편이 가장으로서의 끈을 놓지 못하고 일하러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오로지 남편을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암에 관련된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 현대의학으로도 할 수 없는 다른 치료법을 찾아 헤맸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남편과 함께 민족생활학교에서 6일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남편의 병이 깊을 때까지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어느 날은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미지 아빠! 방조죄가 뭔지 알아?”
“바다에 쌓아 놓은 둑이지.”
남편은 방조죄를 방조제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관심을 못 받고 자란 나는 모든 걸 알아서 척척 챙겨주는 남편이 믿음직스러웠다. 남편은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주말이면 집안일도 함께 하였다. 그 무엇보다도 고마운 점은 딸들에게 자상한 아빠였다. 휴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축구도 하고 자전거도 함께 탔다.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쳐주고 아이들과 한 약속은 어김없이 지키는 아빠였다. 또 투병하는 동안에도 시댁에 내려가 혼자 농사짓는 어머니를 도와 드렸다. 아프면 쉬어야 하는데 아프기 전과 똑같이 일하는 남편을 보며 살려고 애쓰지 않는 것 같아 야속하기도 했다.

평소 남편이 취미도 없이 식구들을 위해 사는 것과는 달리 나는 내 일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글쓰기 공부하러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에 나갔다. 그런 내 모습이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남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그래서 13년 전에 들은 “밥이 넘어가?” 라는 남편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얹혀서 내려가지 않았나 보다. 왜냐하면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그동안 내가 남편과 아이들한테 등한시 한 것이 서운해서 불쑥 던진 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찬찬히 떠올리다 보니 나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한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고 보살피느라 애쓴 남편의 행동으로 보아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아픔보다는 가장 먼저 모든 일에 어설프기만 한 아내가 더 걱정이 되어서 “밥이 넘어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마음속으로만 고마워했다. 비록 말로는 표현하지 못해서 더 미안하고 아쉽지만, 고마운 마음이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내 안에 스며들어 어딘가에 고여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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