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처럼 도로와 차량 같은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내륙 또는 산촌에 사는 사람이 물고기를 비롯한 신선한 해산물을 맛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선함을 포기하는 대신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금에 절이는, 이른바 ‘염장(鹽藏)’을 함으로써 유통기한을 늘였다. 예컨대 경상북도 영덕(盈德) 강구항에서 잡은 고등어를 안동(安東)으로 수송하기까지 이틀이 소요되므로, 소금에 절여 가져간 것이 바로 ‘안동간고등어’의 시작이다.

산촌이나 내륙에 살고 있는 경우라면, 이러한 염장류 해산물을 먹을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이라도 있다. 그러나 남쪽 바닷가 고을 순천에 유배 또는 관리로 임명되어 타의(他意)로 온 산촌 사람은 이곳 음식을 어떻게 여겼을까?

고을 노파 박수가 이웃에서 시끄럽더니
북녘 길손 처음 꼬막과 진주조개 맛보네
매운탕에 쌀밥을 더한다면야
오랫동안 해남사람 되기를 사양치 않으리

村婆拍手閙諸隣(촌파박수료제린)
北客初嘗瓦壟蠙(북객초상와롱빈)
但使羹魚幷飯稻(단사갱어병반도)
不辭長作海南人(불사장작해남인)
 

 
 

본래 개성(開城) 사람인데 남쪽 바닷가 순천으로 유배 와 있는 자신을 ‘북녘 길손[北客]’이라 표현한 심원자 한재렴(1775-1818)이 연자루에서 지은 시다. 와롱(瓦壟)은 와롱자(瓦壟子)를 줄인 말로, 꼬막을 가리킨다. 꼬막은 『동국여지승람』에 전라남도의 장흥ㆍ해남ㆍ보성ㆍ고흥의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증명하듯 순천과 바로 인접한 보성군 벌교(筏橋)는 지금도 꼬막이 유명한 곳이다. 갱어(羹魚)는 물고기 국, 곧 매운탕이다. 바닷가 순천에서 꼬막, 진주조개, 매운탕을 처음으로 맛본 한재렴은 순천에 눌러 살면서 해남 사람이 되고 싶어 할 정도로 해산물 맛에 대한 매료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달리 낯선 환경의 음식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물리기 마련인지라, 1880년~1881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한양 사람 김윤식(金允植)은 연자루 시에서 이렇게 푸념한다.

내륙에 살다 장기 있는 고을에 객이 되니
매끼 해산물이 나물 먹던 속을 물리게 하네
저물녘 성 남쪽 객사에서 죽순을 삶으니
옥판의 향기로 선정의 기쁨에 새로 드네

我本山居客瘴鄕(아본산거객장향)
海腥朝暮厭蔬腸(해성조모염소장)
晩來燒筍城南舍(만래소순성남사)
禪悅新參玉版香(선열신참옥판향)

 

 
 

지금의 자연환경과 달리 조선시대의 순천은 읍성 근처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내륙의 음식에 익숙한 김윤식은 습한 기운이 풍토병을 일으키는 바닷가 고을 순천에 부임한 뒤 매끼마다 올라오는 해산물에 염증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옥판(玉板), 즉 죽순을 삶는 냄새를 맡은 그는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된 환희를 선정(禪定)에 들 정도의 기쁨[禪悅]에 견주었다. 죽순을 ‘옥판’이라 한 데는 고사가 있다. 송나라 소식(蘇軾,1037-1101)이 유안세(劉安世,1048-1125)와 함께 옥판화상(玉板和尙)에게 참선하러 갔다. 도중에 죽순을 맛본 유안세가 소식에게 이름을 물었는데, 소식이 “설법을 잘하는 옥판화상이 그대에게 선열(禪悅)을 맛보게 한 것이다.”라며 희롱하였다.

해산물 음식 맛에 대한 저마다의 성향을 담은 평가지만, 이런 기록은 순천의 많은 누정 가운데 연자루 관련 시에서만 나타난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