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광장신문은 협동조합이 만든 신문이다. 조합원들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담을 때 협동조합 언론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순천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할 것으로 보고‘IN 순천, 순천인’을 기획한다.

정근이
내 이름은 정근이다. 성은 없는 것 같다. 나의 기품 있는 외모에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지만 누나가 지어준 이름이다. 사실 친누나는 아니다. 나는 원래 고아인 것 같다. 언제부터 혼자 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우리 동네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있어서 먹이 사냥(알고 보면 구걸)이 쉽다. 학교 후문 쪽에 횟집이 있는데 으슥해지면 구운 생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욕심 많은 사장님이 나를 경계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큰 생선 머리를 주기도 한다.

그날도 예의를 갖추고 생선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시끄러운 아주머니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 도둑고양이야! 저리 가! 만지지마! 쟤들 털에 병균이 많다네.” 참 교양 없는 사람들이다 여겨져 하악질을 두어 번 해주었는데 무리 중에 누나가 있었다. 누나는 “그러지마. 불쌍하잖아. 누나가 소시지 줄게. 정근아!” 하며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불쌍하다는 뜻은 잘 모르지만 누나를 따라가기로 했다. 누나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내가 부르는 소리를 아는 것 같다.

누나는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사료라는 음식을 주었다. 어느 날 배가 고파서 누나를 크게 불렀더니 무서운 아저씨가 와서 화를 냈다. 누나가 말했다. “정근아! 낮에는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이렇게 해 질 녘이나 밤에 만나자. 알겠지?”
……
“야옹” 

인간이란 원래 배신을 잘한다고 101동 흰둥이(유기묘 페르시안)가 그랬지만 누나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 같다.
 

▲ 정근이 – 밥 주는 엄마나 아줌마라고 하고 싶었는데 누나라고 해서 내가 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양보하기 로 했다.

까망이
나는 까망이다. 90%의 반짝이는 검은 털과 목 주변에 하얀 턱시도 털이 있다. 나는 어쩌면 이탈리아에서는 인기 있는 고양이일 것 같다. 고대 로마 황제 이름에서 따온 ‘네로’라는 이름으로 노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만큼 나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주차장에서 낮잠을 자다가 사람들과 마주칠 때 그들은 대부분 얼굴을 찡그린다. 나도 등의 털을 꼿꼿하게 세워 기분이 나쁘다고 한마디 해준다. “아저씨! 가던 길 가세요. 야옹”

103동 어느 집 베란다에는 화분이 많다. 꽃구경하다가 집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눈싸움에서 이기면 이 근처가 내 영역이 되지만 일부러 져주기로 했다. 나도 정근이처럼 밥 주는 언니를 만들고 싶었다. 배를 보이고 드러누워 콧등을 두세 번 비벼주었더니 1층 언니가 밥을 주기 시작했다. 가끔 특제 참치통조림도 준다. 나는 네로라는 이름이 좋았지만, 언니가 까망이라고 부른다.
 

▲ 까망이 - 고양이들은 맘에 드는 사람에게 선물(나뭇잎, 자갈, 가끔은 쥐)을 주며 감사를 표현한다. 오늘은 까망이가 1층 언니에게 나뭇잎을 물어왔다.


선희 씨 이야기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나는 고아였다. 부모님과 동생 둘(정근이와 진희)이 있었다. 나주가 고향이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75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려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집안 어른들 얘기로는 술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1970년대 변변한 재산도 기술도 없던 시골 아낙네가 남편을 잃었으니, 어머니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이해를 하지만, 어쨌거나 어머니는 우리 3남매를 두고 재가를 하셨다. 집안 어른들은 첫째인 나만 남겨두고 두 동생을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서 미국으로 입양 보냈다. 보내려면 다 같이 보낼 것이지, 제사 운운하시며 큰아들의 첫째 딸이라는 이유로 나만 남겨둔 것이었다. 동생들과 헤어지던 날의 기억도 희미하다. 그저 어디 좋은 곳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고 며칠 지나면 다시 만나는 줄 알았다. 나중에 그것이 영영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고 집안 어른들을 원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산업체 근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17살이 되어 처음으로 용돈을 만져보았다. 첫 월급(약 6만 원)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던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방직공장 일을 몇 년 더 했다. 저축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고향을 떠난 삶은 신세계였다. 

결혼준비를 하다가 상견례 문제로 거의 15년 만에 재가한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많이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놀라서는 작은방으로 들이셨다. “식구들(재가한 가족)이 니가 누구냐고 물으면 친척 동생이라고 해라. 나는 느그 김 씨네 잊은지 오래여. 다시는 오지 마라이” 엄마를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언니!
나는 그 후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 선희 씨는 8년 전에 순천으로 이사를 와서 연향동에 살고 있다. 이미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동네 길냥이들을 돌보고 있지만 가끔은 싫어하는 이웃들과 충돌도 있다고 한다. 가끔은 아픈 아이들을 위해 영양제와 항생제를 사료 위에 뿌려준다. 고양이들도 나름의 네트워크가 있어서 캣맘을 알아보고 따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져서 걱정이긴 하다.

결혼 후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입양 간 동생들을 찾아보자고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어렵게 1년 만에 동생들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 한집으로 입양이 되어 남매가 같은 집에서 성장했다는 소식에 또한 감사했다. 언제나 만나게 될까? 내가 미국으로 갈까? 영어도 못 하는데 인사는 어떻게 할까? 전화통화를 약속한 날이 다가올 때 거의 밥도 못 먹었다. 드디어 전화가 왔다.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우리는 김선희 씨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 가족이 아닙니다. 유감입니다.”
유감이라고 했다. 내가 그들을 버린 적이 없는데 그들은 나를 거부했다.
 

▲ 15kg 한 팩 - 23000원 으로 일반적인 사료의 1/4가격이다. 요즘 따르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이제 한 달에 두 팩은 사야 할 것 같다.

꼭 그래서 내가 캣맘이 된 것은 아니다. 단지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는 약한 동물이라 측은해서 밥을 주는 것이다. 특별히 내 어린 시절과 연결해서 억지로 동화를 만들고 싶지도 않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라서 배고픔이 죽음의 이유가 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길고양이들에게 주는 사료는 15kg 한 통에 23000원이다. 커피 몇 잔 값 아끼고 저녁 산책 시간에 10분만 부지런하면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소소한 약속을 믿는다. 고맙게도 고양이들은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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