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연자루 내력

제비[燕]는 미인을 비유한다. 예컨대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비(妃)이자 미인인 그녀는 몸매가 날씬하여 나는 제비처럼 춤을 잘 춘다고 하여 조비연(趙飛燕)이라 불렀다. 따라서 ‘연자루(燕子樓)’라는 명칭에는 미인이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1900년대 초 순천 연자루

순천 읍성 남문 문루 명칭을 ‘연자루(燕子樓)’라고 지은 이유에 대한 사실 기록은 없다. 그러나 승평[순천] 입장에서는 소강남 구현을 위한 명시적 사물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중국 서주(徐州)의 장음이 관반반을 위해 지은 누각에 제비가 날아들어 ‘연자루’라고 이름한 것을 차용해 남문루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일의 선후가 다르기는 하지만, 서주의 관반반에 비견되는 순천 연자루의 미인 고사는 소강남 구현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호호(好好)와 벽옥(碧玉)이다.

서리 내린 달밤에 처량한 연자루     霜月凄涼燕子樓
떠난 낭관을 꿈에서도 그리워했네     郞官一去夢悠悠
당시 좌객 늙었음을 탓하지 마오     當時座客休嫌老
누각 위 미인도 백발이 되었으니      樓上佳人亦白頭

고려시대 승평판관과 안찰사를 지낸 장일(張鎰,1207-1276)이 지은 「과승평군」으로, 손억(孫億)이 승평군수로 재직할 때 사랑했던 관기 호호를 이별 후 늙어서 다시 찾아온 사랑이야기를 노래한 시다.

시어 서리[霜]는 임과 이별 후 시리게 아프고 차갑게 식어가는 호호의 마음과 홍안(紅顔)에서 시들어 주름져가는 호호의 얼굴을 암시하기 위한 소재로 쓰였다.

장일은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연정(戀情)에 잊지 못하는 손억과 연자루에서 별한(別恨)을 간직한 호호의 마음을 대변하는데, 그 이면에는 정욕(情慾)의 덧없음과 인생무상을 함축하고 있다.

구십포 어귀엔 조수가 일려 하고      九十浦頭潮欲生
푸른 솔 단풍 숲은 지난날 노정이었지     碧松紅樹去年程
지금 부질없이 깃발 앞세워 지나가건만     如今謾擁旌旗過
연자루 위엔 행차 바라볼 그녀도 없네    樓上無人望此行

박충좌(朴忠佐,1287-1349)는 연자루에서 벽옥(碧玉)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다 헤어졌다. 이후 1332년 전라도안렴사가 되어 행차를 알리는 깃발을 앞세우고 승평을 지나가다 정인(情人) 벽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한 심사와 늦게 온 것에 대한 회한(悔恨)을 위와 같이 노래하였다.

이와 같이 관원과 기녀의 사랑, 이별과 그리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순천 연자루는 창건연도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화재나 정유재란 등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고, 일제(日帝)의 시가지계획령(市街地計劃令)에 따라 1934년 훼철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재일교포 김계선(金桂善)은 사재를 출연하였고 관민도 노력을 더하여, 1976년 여름에 지금의 조곡동 죽도봉공원에 연자루가 옛 모습대로 다시 건립되었다.

▲ 호남성 악양현의 악양루(岳陽樓)  석양

당시 성균관 관장 박성수(朴性洙)는 등람의 감상을 중국 호북성 대나무가 유명한 황주(黃州)의 죽루(竹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에다 호남성 악양현의 악양루(岳陽樓)에서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아침 햇살과 석양을 바라보는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 호남성 악양현의 악양루(岳陽樓)

요컨대 순천 연자루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순천의 랜드마크이자 소강남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락처(宴樂處)이자 사랑과 이별의 공간이다. 연자루에 올라 제비가 나는 이 봄에 호호와 벽옥을 추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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