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2일 고흥문화회관에서 월파 서민호를 추모하는 뜻깊은 학술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월파 서민호 선생의 회고록이 단행본으로 선을 보였다.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 시대와 맞서면서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사라져갔고, 그의 동지와 가족들은 힘을 잃었다. 이승만의 치부를 건드렸던 그의 존재는 세인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이승만 정부의 비민주적 폭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월파 선생의 회고록은 사실 지방신문의 연재물이었다.
1980년 이전 순천 지역에는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이 양립하며 건강한 경쟁과 협력을 통하여 지역의 파수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월파 회고록은 전남매일에 장장 50여 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것이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언론 통폐합 조치를 단행하며 기자들을 내쫓고 광주일보를 창간한 이후 그 기사의 존재도 잊혀졌다. 그러던 것을 조선대학교 오수열 교수가 서민호 관련 논문을 쓰면서 처음으로 발굴 소개했고, 이를 통해서 접한 필자가 광주일보를 드나들면서 기사를 옮겼으며 부족한 기사는 국회도서관의 기사를 통해 보완하였다.

월파 회고록 단행본은 오래된 지방신문 연재물
지역신문은 중앙 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는 그 지역의 사료가 된다. 신문 한쪽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정규 님의 회고에 따르면 순천에도 많은 지역 신문이 있었다. 4.19혁명 후 순천일보, 순천매일신문, 서남신문이 있었으나 5.16 이후 폐간되었다. 이후 주간 전남경제신문이 있었는데 지방 본사를 갖고 있는 신문이 되었지만, 1981년 1월 언론통폐합 때 폐간되었다는 것이다. 근래에도 순천신문, 순천시민의신문이 있었지만 결국은 문을 닫고 말았다.
광주권에서 펴내는 신문을 보면 지역신문이라 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기사가 중앙지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지역 신문 기자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계층이었다. 이들은 기자 신분을 무기로 총독부의 통치 정보를 얻어내며, 민족 진영의 요구를 당국에 전하는 통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우리 순천의 지역사회운동을 주도했던 김기수, 박병두, 이영민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노동야학을 만들고, 각 면을 다니면서 농민들을 조직화했으며, 자유노조를 만들었다. 기자들의 연합 조직을 만들어 진실 보도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문에 사료로도 쓸 수 있는 기사 많았으면
해방 후 각종 신문이 많이 나왔지만, 지역민의 대변자는 아니었다. 지역 토호들은 신문을 자신들의 이권 방패막이로 악용하였다. 이들은 기사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관의 보도자료를 본사에 올려주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지역신문을 유지시켜 준 것은 일반 독자들의 구독료가 아니라 관의 구독료였고, 홍보 광고비였다. 이런 속에서 나온 기사들을 지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쓰기에는 너무도 미흡하다.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신문이 나왔다. 후일의 사가들이 사료로 주저하지 않고 쓸 수 있는 2차 사료가 되도록 충실한 기사들이 많이 실렸으면 좋겠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기자들이 생계 걱정하지 않고, 신문 발행비 걱정하지 않고 신문 제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한다면 자연 해결될 것이다.
신문 지면에 기록이 충실하지 않은 시기의 역사를 메워줄 수 있는 기록물들이 실렸으면 좋겠다. 제주 4.3 사건이 이토록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제민신문의 장기 기획 때문이었다. 지난 시대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것이면 된다. 생활과 밀착되어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도 있을 테니까.
 
박병섭
순천공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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