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떨기 모란꽃 관반반

재색(才色)을 겸비한 여인을 꽃에 견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예컨대 중국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를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花)”라 일컬었다. 

이후 ‘해어화’는 미인이나 기녀를 비유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처럼 어떤 말이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위해서는 고사나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일이다. 강소성(江蘇省) 서주자사(徐州刺史) 장음(張愔)은 시문에 정통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미모와 요염한 자태를 가진 기녀 관반반(關盼盼,787-820)을 사랑하여 첩을 삼았다. 그녀는 원래 학자 가문 출신인데, 가세가 몰락하여 기녀가 되었다. 장음은 그녀를 위해 산을 등지고 강을 끼어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누각을 지어 주었는데, 봄과 여름에 제비가 짝을 지어 누각 위를 날아다니므로 “연자루(燕子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 중국 강소성 서주 연자루


당대에 이름난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804년 서주를 유람할 적에 장음이 베푼 연회에서 흥취를 북돋우던 관반반을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란꽃”이라 평하였다. 

이후 백거이는 12년 만에 벗 장중소(張仲素,769-820)를 통해 남편이 죽은 후 연자루에서 10여 년을 수절하였다는 관반반의 소식을 듣고서, 꽃이 크고 화려해 화중왕(花中王)이라 불리는 모란꽃으로 대상화했던 강렬한 첫인상을 떠올리며 연민의 정을 담아 시를 지었다.

▲ 모란꽃

  창엔 달빛 한가득 주렴엔 온통 서리
  이불 차고 등불 스러져 잠을 깨었네
  연자루의 서리 내린 달밤은 
  한 사람을 길이 근심케 하네

  滿窓明月滿簾霜
  被冷燈殘拂卧牀
  燕子樓中霜月夜
  秋來只爲一人長

또한 백거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해 길러준 관반반을 포함한 기녀들이 도덕적 관념상 남편 장음을 위해 순절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절조 없음을 기롱하며 “돈 아낌없이 미인을 사서, 꽃 같은 기녀 서너 명 뽑았네. 심력 다해 춤과 노래 가르쳤건만, 하루아침에 남편 죽어도 따라 못 죽네.[黄金不惜買蛾眉, 揀得如花三四枝. 歌舞教成心力盡, 一朝身去不相随.]”라고 하였다.
 

▲ 관반반

이에 관반반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자신의 속도 모르는 데다 “모란꽃”이라 칭찬했다가 절조 없다고 기롱한 백거이를 비꼬며 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담아 항변하였다.

  빈 누각 지키며 한을 품고 늙지만
  봄 지나도 모란 가지 여전하다오
  벼슬아치 남 깊은 속도 모르고
  저승 따라 안 갔다고 의아해하네

  自守空樓斂恨眉
  形同春後牡丹枝
  舍人不會人深意
  訝道泉臺不去隨
 
여기서 더 나아가 관반반은 “어린아이가 학을 몰라보고, 멋대로 진흙 가지고 흰 깃털 더럽히네.[兒童不識沖天物, 漫把靑泥汙雪毫.]”라고 하며, 어린아이 같은 백거이가 고결한 학 같은 자신을 제멋대로 재량한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담은 채 절기(節妓)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연자루는 “모란꽃”같은 관반반을 위한 공간이고, 사랑과 이별의 공간이며, 수절(守節)의 애한(哀恨)이 담긴 공간이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의 문학 소재가 되어 급속히 전파되었고, 소설이나 희곡으로도 발전하였다.
 

▲ 죽도봉 연자루

예전에 순천읍성 남문의 문루이던 연자루는 지금 조곡동 죽도봉공원에 있는데, 그 기원은 바로 앞서 말한 중국 강소성 서주의 연자루이다. 또한 장음과 관반반이란 주인공이 있듯, 순천 연자루에도 손억(孫億)과 호호(好好) 및 박충좌(朴忠佐)와 벽옥(碧玉)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를 중국에 견주어 소중화(小中華)라고 하듯, 순천을 소강남(小江南)이라 일컫는 데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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