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문수현
    순천여고 교사

밭에서 멧돼지가 망가뜨린 울타리를 열심히 보강하고 있는데 두둑에 놔둔 핸드폰이 울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전화를 받았더니 내 이름을 대면서 맞느냐고 묻는다. 표준어를 쓰는, 4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정중한 남자 목소리다. 얼떨결에 맞다고 대답했다. 
“저는 청주지방검찰청 최영익 수사관인데요,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전에도 청주지검이라며 걸려온 전화를 두어 번 받은 적 있어서, 어떤 전화인지 직감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런데요?”라고 되물었다.

그가 말하는 순서와 내용은 전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중요한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했다. 그전엔 이쯤에서 내가 전화를 끊었는데, 이번엔 전화를 끌기로 마음먹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전화를 이어갔다. 그는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직장을 들먹이며 “거기서 근무하셨죠?”라고 묻는다. 지금 근무하는 곳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했다.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면 공문으로 통보해야 하지 않나요? 공무원은 공문으로 말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님 직접 찾아오시든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수사관님’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이 ** 안 되겠구만!”했다. 
그는 쌍시옷과 쌍기역이 섞인 말을 마구 쏟아냈다. 
그의 황당한 욕설을 들으며 여간해서 흥분하지 않은 난데 열이 팍 올랐다. 
“이거 ㄱ쓰레기구만, 양아치 **!”라고 대거리를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2.
우리 밭이 동네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멧돼지의 출현은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멧돼지는 몇 년 동안 밭 울타리 바깥에서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아먹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집 일손이 딸린 줄 알고 풀을 매 주었네.”하면서 여유를 부렸다. 

늦자두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거의 다 익은 자두를 못 먹게 만들었을 때도, 짐짓 “멧돼지랑 나눠 먹어야지, 혼자 다 먹으면 쓰나”하면서 생태주의자인 척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런데 멧돼지는 그간 ‘밭 울타리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신사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올 봄부터 무시로 울 안으로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싱싱하게 자라는 감자, 양파 고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하얀 꽃이 피는 완두콩밭과 상추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을성이 많은 나이지만 나라 빼앗긴 백성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어쩌지 못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문제는 울타리였다. 모기장 비슷한 망으로 울타리를 둘러놓았었는데 점검해 보니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쇠말뚝과 철망을 사서 울타리를 다시 쳤다. 이틀간에 걸친 대공사(?)였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고 연장을 정리한 후, 농막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아주 가까운 곳에서 “꿰~엑~ 꿰~엑~~”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내, 잘못한 것 하나 없는 내가 겁먹은 것이 자존심 상해 “야~이 멧돼지 **야! 이런 썩을 노무 **가 어디서~~!” 고함을 꽥 질렀다. 멧돼지는 “초저녁에 식사 좀 하려는데 왜 방해를 해! 꿰~엑~ 꿀꿀~~” 불만을 터뜨리며 밭 저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3.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어떤 국회의원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평했단다. ‘똥 싼 놈이 성내는’ 일은 그밖에도 흔하다. 내 돈을 가로채려는 사기꾼이, 내 농사를 망치는 멧돼지가, 미안해하기는커녕 되레 욕을 하고 성질을 내는, 이런 황당한 일은 언제쯤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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