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에 도전하는 청춘 / 골목안고깃집’운영하는 김종효 씨

“고깃집 총각이 좋은 일 많이 혀”

어르신들이 칭찬하는 소문을 듣고 문화의 거리 골목 안에 숨어있는 ‘골목안고깃집’을 찾아 건장하고 듬직한 김종효 씨(30세)를 만났다.
 

김종효 씨

김종효 씨는 학창 시절 육상선수였다. 고교시절 육상으로는 직업을 삼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군대를 갔다. 직업군인으로 6년 차가 되고 보니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해양경찰과 사업을 고민했다. 그런데 사업은 언제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장사는 쉽다고 생각했다.

2014년 4월 30일 중사 전역을 했다. 해양경찰특공대가 되기 위해서였다. 세월호참사가 있던 바로 뒤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의 이해되지 않는 여파가 종효 씨에게도 미쳤다. 전역 7일 만에 해양경찰청이 해체되었다. 해경이 폐지되니 특공대를 뽑을 리 만무했다.

종효 씨는 여행을 떠났다. 홍대 앞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젊은 사업자들을 보고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어려서부터 운동을 했고 군생활을 해서 ‘다,나,까’로 딱딱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한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 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2015년 3월 3일, 지인의 가게 앞에서 길거리 창업을 했다. 가족들 반대가 심했다.

“같은 시간이면 자유롭게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고 싶고, 6년이란 고정된 시간을 보냈는데, 아르바이트하면서 시간에 매이는 게 싫었어요.”

가족들과 4개월 120일 동안만 하는 것을 약속하고 시작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순천길거리크레페를 검색하면 그 시절에 다녀간 분들이 남긴 SNS 글을 볼 수 있다.

“서른 살이 되면 내 매장을 열겠다.”

종효 씨 말에 손님들이 호응해주었다. 돈을 버는데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니 수익의 일부로 할 수 있는 것을 손님들과 함께 찾았다. 길거리크레페 단골손님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 여름계곡 환경정리, 농번기 일손 돕기, 성신원 어린이들과 공차고 크레페 만들어주기 등. 처음엔 모임이름을 ‘행복찾기’로 하다가, 120일 동안 만난 손님들이라서 이름도 ‘120친구들’로 했다. 지금도 손님들로만 구성된 60명이 활동을 하고 있는데 기존의 활동 외에 ‘골목안고깃집’에서 장사하면서 남은 자투리지만 신선한 고기를 동네 어르신들과 지인들에게 가끔 대접한다.

 

120일 실험
120일 동안 시험을 끝내고는 또 다른 시험을 시작했다. 푸드트럭을 했는데, 붙박이가 아니라 순천대 앞, 신대지구, 호수공원 등 요일별로 장소를 달리했다. 또한 메뉴도 장소에 따라 다르게 시도했다.

장사 외 시간엔 왕조 방범대, 의용소방대에 참가했다.

“어른들과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삼촌들께 맨날 여쭤봐요. 삼촌들과 대화하면서 많이 배워요.”

꿈꾸었지만 멀어진 직업을 옆에서 돕는 의미도 있고, 여기서 다양한 인생 경험을 듣는 것은 글이나 다른 매체에 없는 살아있는 배움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은 진짜 삼촌으로 오해할 정도로 친근함이 묻어난다.

하나씩 배워가던 종효 씨는 2017년 2월 8일, 청춘창고에서 ‘120레스토랑’을 개업했다.
“120일 장사하던 초심을 잃지 말자.”는 생각으로 이름 지었다. 

청년지원으로 사업한 지 1년이 다 되어가자 정말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었다. 연향동과 지금 자리 두 곳을 고민했다.

“번화가야 먹거리도 많고 사람도 많은 곳인데, 번화가의 살짝 외곽에서 조용히 해보고 싶었어요. 아직은 연습을 더 해보자, 청년지원을 받아서 청년창고에서도 해봤으니까 그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성장해보자.”

연향동 쪽은 권리금이 있지만, 창고도 있고, 환풍구 설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리는 집주인의 어머니께서 살던 집을 개조한 공간으로 비어있었다.

 “처음 갖는 진짜 내 가게인데 내 손으로 꾸미고 싶었어요. 부족한 것도 있지만 괜찮아요.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잘 할 수 있어요.”

 

앞으로 종효 씨는 큰 가게로 늘리기보다는 작은 가게를 3개쯤 직영하고 싶다.

 

지금 가게에서 쓰는 식재료들은 도사동에 사시는 할머니와 그 마을 분들에게서 구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영수증이 없기 때문에 세금처리가 되지 않아 손해가 있다. 그래서 농산물을 유통할 수 있는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 할머니들께서 “뭐하러 그래?”라며 별 반응이 없어서 할머니들의 자녀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다. 새벽에는 경매장에도 나간다. 유통에 대해 배우는 중이다. 종효 씨에게 삼촌이 더 생길 것 같다. 그런데 종효 씨 가게 하나로 거래해서는 유통량도 적고 이윤도 적다.
“그래서 가게가 3개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유통이 돼요”
 

힘이 되는 사람들
종효 씨는 푸드트럭을 하면서 여자 친구를 만났다.
“많이 싸우지만, 많이 힘이 돼요.”
“여자 친구는 내가 가는 길을 따른 것뿐인데 내가 이 친구에게 의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저도 하다보면 많이 힘드니까. 그래서 싸우고…, 그래서 헤어질 뻔도 했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때가 최대 고비였죠. 싸우고 나면 장사가 안되더라구요.”

마음이 힘들었다. 장사 준비도 미흡하고 손님응대도 되지 않았다. 종효씨는 웃는다고 하는데 손님들은 표정에서 뭔가를 아는 것 같았다.  이때가 사업과정에서 가장 큰 고비였다. 그러나 그 여친과 지금 ‘골목안고깃집’도 같이 하고 있다. 여친에게 잘해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올해 결혼계획이 있다.

종효씨는 이야기하면서 삼촌을 자주 이야기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삼촌들께 여쭌다. 출장뷔페를 나가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봉사활동을 할 때도, 영수증발행이 안되어 세금을 내야 할 때도, 유통에 대해 배우는 과정에서도 삼촌이 등장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할 것 같은데, 종효씨는 아니라고 했다.

“군대에서 저보다 나이 든 분들과 지내는 것에 익숙졌어요. 사람들은 시간낭비라고 하는데, 저는 ‘작은 사회’에 다녀 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그 어떤 경험도 소중하게 여기는 종효 씨다.

 

종효 씨는 35세가 된 자신의 모습을 노트에 적어두고 가끔씩 본다. 남들이 보면 웃긴다고 할 수도 있어서 남에게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장래 가게3개를 운영하고, 거기에 채소를 납품하는 협동조합, 유통체계를 만드는 계획을 갖고 있다. 식당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할머니와 농부들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식당의 세금 계산도 할 수 있고, 농부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는 식재료들을 이용해서 무료밥집을 하고 싶다. 무료급식을 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어려운 분들이 그곳을 이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분들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무료 급식소라고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 보통 식당에서 편안하게 식사하고 갈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데 종효 씨가 말한다.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요.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고비가 있을 때마다 뚝심 있게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하고 있으면, 인터뷰 한 번 더 해주세요.”

5년 뒤, 인터뷰하는 종효 씨의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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