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김현진의 재미있는 순천사

수죽향(水竹鄕)은 ‘물과 대나무의 고을’이란 말이다. 즉 시내나 강물 및 대나무처럼 그 고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거론하여 그 지역의 자연 풍광이 좋음을 압축한 표현이다. 그러면 순천과 수죽향은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을까?

▲ 동천 및 삼산 비봉산 난봉산 그리고 시가지

익히 알다시피 동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옥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두 시냇물은 순천읍성을 감싸고 흐르다 합류하여 남쪽 너른 들판을 푸른빛으로 가로지르며 내달려 바다로 간다. 한편 조선시대 순천에는 순천읍성 동쪽에 우뚝 선 봉화산 자락의 죽도(竹島) 또는 죽도봉(竹島峯)이란 이름이 방증하듯, 사계절 내내 초록빛으로 싱그러운 경관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이나 울타리 등을 만드는 데도 유용한 대나무가 많았던 듯하다.

1500년 5월 유배 와서 읍성 서문 밖에 살던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는 「임청대기」에서 “대울타리의 초가가 주위에 즐비하다.”라고 하였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1537-1616)는 순천을 가본 자신의 경험담을 담아 순천부사로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며 지은 시에서 “명승지로 일찍이 소강남이라 말하며, 대숲 속 인가들이 푸른 산 곁에 있지.[名區曾說小江南,竹裏人家傍翠嵐.]”라고 하였다. 또 1610년 윤3월에 부임한 유영순(柳永詢,1552-1630)이 「공북당(拱北堂)」 시에서 “맑고 고요한 밤 죽원 깊은 곳, 고당에 한가히 앉아 거문고를 타네.[淸夜沉沉竹院深,高堂閑坐撫玄琴.]”라고 한 것을 보면, 읍성 내에도 대숲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순천 지역민도 아니고 순천에서 벼슬하거나 우거한 적도 없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1625년 순천부사로 보임되는 정유성(鄭維城,1596-1664)을 전송하며 지은 시에서 “백성 많고 누대 있는 물과 대의 고을로, 번화하기가 예로부터 남방에 으뜸이네.[萬戶樓臺水竹鄕,豪華自古擅南方.]”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남쪽지방 순천이 수죽과 누대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당시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서술한 소강남・선향・수죽향의 공간인식은 순천 지역의 정체성에 해당한다. 234년 전 주암(住巖)에 살던 조현범(趙顯範,1716-1790)은 이런 인식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강남롱(江南弄)」을 읊었다. 그 대략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호남의 바닷가 경치 빼어난 湖海形勝
하나의 큰 고을을  一大都護
예로부터 아름다운 강남이라 했네 自古佳麗江南
연자루와 환선정에서는  粉樓畵閣
신선 이야기하고 제비 지저귀네 仙語鷰喃

(중략)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옥천 가 水西東
집이 몇 채인가   凡幾家
대나무 울타리 즐비하고  竹籬櫛比
복사꽃 어지러이 져 늘어졌네 桃花亂落毿毿

(하략)
 

▲ 강남악부 강남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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