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김현진의 재미있는 순천사

순천을 가리켜 ‘정원의 도시’라던가 ‘소강남’ 또는 ‘강남’이라 하는 경우는 더러 들어서 익숙한 말일 듯하다. 그런데 순천을 선향(仙鄕), 즉 신선의 고을이라 지칭한다면 정말 뜬금없고 황당한 말일까?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의 유래에 대해 채팽윤(蔡彭胤,1669-1731)은 「선암사중수비」에서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바위 곁에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827-898)이 암사를 중창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미 ‘순천’은 신선과 관련성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암사에는 승선교(昇仙橋), 강선루(降仙樓), 대선루(待仙樓) 등 신선과 관련한 건물명이 있다. 또한 선암사 아래에는 죽학(竹鶴)・무학(舞鶴)의 지명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삼신산(三神山)은 봉래산・방장산・영주산을 말하는데, 현 순천시 상사면에는 이수광이 『승평지』에서 언급한 봉래산(蓬萊山)도 있다.
 

▲ 선암사 승선교와 강선루


이와 같이 사찰의 명칭이나 지명으로 전해지는 신선 관련 내용은 조선시대 남원부사를 역임하고 송광사에 머물기도 했던 유몽인(柳夢寅)이나 순천부사 성이호(成彛鎬) 등에 의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은 순천이 지리적으로 방장산[지리산]과 영주산[한라산] 사이에 위치하고 풍광이 수려하므로, 신선이 유식(遊息)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에 문인들은 작품에서 순천지역을 선향(仙鄕)・선구(仙區)・선계(仙界)・선도(仙都)・영경(靈境)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런 인식에 동조하였다.

예컨대 순천부사 이수광은 그의 시 「공북당(拱北堂)」 수련과 함련에서 “아름다운 강남 고을에, 맑고 그윽한 공북당. 사람들 태곳적 같이 순수하고, 풍속은 선향을 말미암아 순후하네.[佳麗江南地, 淸幽拱北堂. 人民猶太古, 風俗自仙鄕.]”라고 하였다. 또 1618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겨와 1619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난 간정(艮庭) 이유홍(李惟弘,1567-1619)은 「차환선정운(次喚仙亭韻)」 시의 수련에서 “두류산 정기가 앞 처마를 압도하고, 선향에서 부사는 관리로 숨어 사네.[頭流山氣壓前簷, 分虎仙鄕吏隱兼.]”라고 하였다.
 

▲ 환선정(국립광주박물관 남도문화전4-순천)


한편 진례산(進禮山:현여수영취산) 성황신 김총(金惣), 해룡산(海龍山) 산신 박영규(朴英規), 인제산(麟蹄山) 산신 박난봉(朴鸞鳳)으로 인해, 순천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시대부터 삼산(三山)과 산신이 있는 고을로 인식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역민은 삼산과 산신을 선향 순천 인식과 결부하여,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대상화한다. 현 용당동 소재의 야트막한 산봉우리 세 개가 이어진 산은 원래 명칭이 원산(圓山)인데, 1872년 순천부읍성지도에서는 ‘三山’으로 개명되어 있다. 이를 보면 1800년대 순천 지역민은 ‘삼산’하면 기존의 세 곳 산신이 있는 산이 아닌, 용당동의 그 산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선말기~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호운(湖雲) 임영모(任永模)는 「환선정」 시 미련에서 “처마 사방으로 환희 트고 멀리 석양 지는데, 삼산이 지척이나 신선은 보이지 않네.[四簷寥廓斜陽遠, 咫尺三山不見仙.]”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삼산’은 신선이 사는 삼신산과 환선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바로 보이는 용당동의 삼산이다.
 

▲ 용당동 소재 삼산

이상과 같이 통일신라시대부터 형성된 선향 인식이 19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점을 미루어보면, ‘선향 순천’이란 공간 인식으로 지역 정체성을 정의한다고 해도 결코 빈말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선향 공간 인식은 순천지역 누정 중 주로 환선정(喚仙亭)에 투영되고 있는데, 차후 상세히 기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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