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광장신문은 협동조합이 만든 신문이다. 조합원들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담을 때 협동조합 언론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순천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할 것으로 보고‘IN 순천, 순천인’을 기획한다.

 

내 친구 아무개는 깻잎소녀였다. 선생님께 절대 들키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는 특급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앞머리를 안경에 붙여 고개를 약 5도 정도만 숙이고 간간히 선생님의 ‘알겠냐?’ 라는 질문에 ‘네에’라며 추임새까지 하는 기술은 나도 배우고 싶었다. 가방 속에는 교과서 대신 하이틴 로맨스(연애소설)를 빵빵하게 최소 8권 이상 넣고 다녔다. 

주말이면 롤러스케이트 장에서 인근 남학생들의 시선을 싹쓸이 했고 대학에 가서도 역시 시내 나이트클럽을 대부분 접수 했다. 사실 모임 때마다 뉴 페이스의 남자친구와 동행하던 친구를 아주 조금 약간 부러워했지만 속내를 감추고 다른 세상 사람인 냥 하찮은 일이라며 관심 없는 척 했었다. 

인생의 최대 목표가 시집 잘 가는 것이었던 내 친구는 정말 시집을 잘 갔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다다익선이니 많을수록 좋다던, 풍요 속에 빈곤이라며 아직도 부족하다던 생 날나리가 이제 권사님이 되었다. 거침없는 행보가 위태로워 조마조마 했던 것은 친구들의 괜한 기우였다. 어찌나 얄밉게 살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지!
 

▲ 미남이신데요~ 다다익선의 추억이 짐작되는 미소를 가지셨어요.

아웃사이더!
요즘은 짧게 줄여서 ‘아싸’라고 한다. 무리에 끼지 못하고 겉돌거나 무리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흔히 아웃사이더라고 한다. 우리는 다수가 정한 통념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도덕성의 잣대로 사람을 보려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시간에 따라 변하니 지금 엇나간 일이라 해서  깊게 고민할 일도 아니다. 지금 들어보면 별일 아니지만 30년 전에는 파격이었을 과거의 아웃사이더 이야기를 들어본다.

장형식 씨 (52세. 순천시 용당동 희망수산. 조례중앙교회 장로님)
내가 장로라니!
장로님 부분에서 빵 터지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분명히 존경받는 장로님이 맞다.

30여 년 전에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아웃사이더였을까? 보성이 고향인 형식 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순천으로 유학을 왔다. 시골 중학교였지만 성적도 좋았고 공부가 재미있었다. 외국어 배우기를 좋아해서 통역사가 되고 싶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시골살림으로 4남매 교육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볼 생각에 전기 부품 회사에 취업을 했다. 

통신 분야가 한참 호황일 때라 일거리가 많아서 스물하나의 어린나이로 직접 작은 규모의 부품제조업체를 창업했다. 일하면서도 외국어 공부는 계속했었는데 그때가 호시절이었다. IMF위기가 시작되며 협력업체들이 줄도산을 하게 되고 형식씨도 경영이 어려워졌다. 운영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택시 기사를 하고 짬이 나면 붕어빵 장사도 해보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전 재산을 다 없애고 겨우 45만 원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
 

꼬막
시골에서 꼬막 일을 하던 누님을 도와 다시 새로운 일을 하게 됐다. 주로 수산물 가게에 배달하는 일이었는데, 일이 많을 때는 거의 졸음운전까지 해가며 새벽시간을 지켰었다. 한번은 보성에서 출발한 기억은 났지만 눈을 떠보니 순천역 앞 로터리였다. 등골 오싹해졌다. 낮에 뱃일을 했으니 밤에는 쉬어야 했으나 쉴 수가 없었다. 이미 아내와 아이들이 생겨 가장이 되었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새벽시장에 가면 수산물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얼음사용을 많이 한다. 적은 자금으로 창업이 가능하겠다 싶어서 얼음 장사를 시작했다. 보성과 순천을 오가며 얼음배달을 했는데 매일 새벽 두시에 시작하는 일이라 늘 잠이 부족했다. 피곤했지만 가게를 키워가는 꿈이 있어서 견뎌온 것 같다. 그러다가 역전시장에 수산물 가게를 개업했고 지금은 가게를 더 키워서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 예전부터 있던 타이어 정비업체를 같이 인수해 두 업체를 운영 중이다. 남들은 가게의 규모를 보고 성공했다고 하는데 사실 가게가 커진 만큼 일도 많고 갚아야 할 대출금도 많다. 여전히 새벽잠 설치며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은 남아있는 빚이 있고 이루지 못한 꿈이 있어서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
 

▲ 역전시장에 수산물 가게를 개업했고 지금은 가게를 더 키워서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 예전부터 있던 타이어 정비업체를 같이 인수해 두 업체를 운영 중이다.

이쯤하면 형식씨는 아웃사이더라고 보기 힘들다. 어깨가 무거운 아주 성실한 가장이다. 스스로 고백하지만 않았다면... 사업을 하다보면 목돈을 쉽게 만질 수 있다. 내일 당장 재료를 사야 할 돈이거나 입금해야 할 대금이어도 내 주머니에 있으면 내 돈 같다. 목돈이 생기면 쉽게 ‘내기’라는 잡기를 즐기게 된다. 십중팔구 이길 확률이 드물지만 자꾸 빠져들게 된다. 게다가 술과 담배는 옵션이다. 영업을 하려면 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30여 년 전 영업 문화는 지금의 방법과 많이 달랐다. 접대라는 핑계로 엉뚱한 오락을 즐긴 때도 있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어 힘든 날이 길었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받아주더라. 고마운 고향에서 그는 술 담배와 절연하고 장로님이 되었다.
 

▲ 나의 꿈(좋은 아빠 되기. 교회 다니기. 장학 후원회 만들기)을 이루기 위해 가게 이름을 희망수산이라고 지었다. -용당동 피오레 입구 쪽-

형식씨는 스스로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이유가 조금 다르다. 본인은 부채감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사업하며 손해를 입혔던 지인들과 쉽게 돈을 벌고자 선택했던 일로 상처를 주었던 이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장학후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학생들을 찾아 후원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절망감을 잘 알기에 꼭 해보고 싶다. 그래서 아직은 못 이룬 꿈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이 없고 쉬어야 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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