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여전히 농촌지역이 도시지역 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 김계수 조합원

처가 쪽 친척 중에 당곡떡이 있다. ‘당’자가 붙은 지명은 민속 신앙이나 무속과 연관되어 있기 십상이다. 동네에서 낙안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못 미쳐 당거리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전에 서낭당이 있었다 한다.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숲이 울창하고 길이 험한 이 고개를 넘기 전에, 혹은 무사히 넘고 나서 돌멩이를 던져두었을 것이다. 당곡은 고흥 동강에 있는 마을인데 아마도 주변에 당골(무당)들이 살았을 게다. 당곡떡하고 두어 번 통화한 적이 있는데, 내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무당이 굿판에서 사설 풀 듯 20여 분씩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늘그막에 부인과 사별한 남자에게 후처로 들어온 사람은 죽은 전처의 택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내심 매우 언짢았을 것이다. 반면에 젊은 시절에 상처한 집에 들어온 여자는 자신만의 택호를 받을 수 있었고 남자에게는 두 개의 택호가 함께 쓰이기도 했다. 어렸을 적 앞 동네에는 부인을 둘 둔 남자가 있었는데, 부인들은 저마다 택호가 있었지만 남자는 무슨 양반으로 불렸는지 궁금하다.

혼인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따라붙는 택호가 허용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당골이나 회관지기 같은 사람들이다. 고향 마을에는 1970년대 초까지 회관지기가 있었다. 마을의 공동 재산인 동답을 지으면서 회관을 관리하고 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야 했다. 그 가족의 살림집인 마을회관 곁의 오두막은 주민들의 화투방이었고, 방안은 그들이 피운 담배 냄새로 짙게 절어 있었다. 확성기도 전화도 없던 그 시절에 마을 회의가 있는 날이면 ‘회관애비’는 짚 앞 논둑에 나와 ‘회의 나오씨오’하고 목청껏 외쳐댔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그 외침의 기척이 있으면 방문을 열고 나와 안산에 부딪쳐 메아리지는 그 소리를 확인하곤 했다.

회관지기의 아내에게도 어엿한 친정동네가 있었겠으나 그이는 택호 대신 회관에미나 자녀의 이름을 따서 ‘ㅇㅇ에미’로 불렸고 남편은 총각들처럼 이름으로 불렸다. 과거 신분 사회의 찌꺼기는 그때까지 살아남아 동네 어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초로의 회관지기 부부에게 하대를 했다. 갓 시집온 새댁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언젠가 나이 스물 중턱을 넘어가는 동네 총각들이 모여 자기네도 회관애비에게 반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발칙한 모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 당골들 역시 택호를 얻지 못하고 외딴집에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하대를 받았지만 회관지기처럼 마을에 속박되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덕일 것이다.

택호는 농촌 마을에서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60대 ‘젊은’ 사람들 중에도 택호로 불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 가족이 처가 동네에 들어왔을 때 장모님은 할머니들에게 아내를 서울떡이라 불러달라고 제안했지만 어떤 호응도 받지 못했다. 동네에서 아내는 딸아이의 이름을 붙여 ‘ㅇㅇ엄마’이고 나는 ‘ㅇㅇ아빠’다. 동네 아이들에게 아내의 이름은 계란아줌마 혹은 계란이모고 나는 계란아저씨다. 옛날 같다면 아내는 본촌(本村)떡이라 불렸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 이름을 모르는 고향 동네 분들은 나를 부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김씨라 부를 때도 있다.

택호가 사라지면서 농촌 마을에서의 호칭은 질서와 품위를 잃고 있다. 남자들이 후배의 부인을 제수, 선배의 부인을 형수로 부르는 것은 무난해 보이지만, 여자들은 남편의 친한 선배에게 시숙님이라는 당치않은 호칭을 쓴다. 동년배나 후배들에게는 이름과 반말이 난무한다. 아저씨나 아주머니는 비칭(卑稱)이 되어버렸다. 자녀가 장성해 어른이 된 지 오래임에도 그 부모는 여전히 어릴 적 ㅇㅇ엄마로 불린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그나마 쓰기 어렵다. 마을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부르는 데 품위와 편의를 제공하던 택호는 아마도 1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송광 신평이 고향인 동네 세펜떡이 지난 주말에 세상을 버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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