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행정학 박사 / 순천소방서 소방공무원

런닝구는 우리네의 속옷(내의)의 대명사가 아닌가 싶다. 유래를 찾아보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필자가 기억하는 것은 딱하나 구한말 서양인들이 들어와서 아침에 운동할 때 입었던 옷이다. 당시 우리 백성들의 옷이라야 부드러운 속옷이 없는 삼베적삼 정도였을 터, 부드러운 옷이 보였을 때 어떠했겠나?

원래의 용도는 운동할 때 입었던 가벼운 옷이었겠으나, 우리에게로 전파되면서 부드러운 속옷으로 변한 것이다. 모든 물건을 만들어진 용도대로 사용하면 좋겠으나 그 나라의 문화나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또한 변화의 산물이니 좋은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면 그뿐이지 않나 하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니 독자들은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중에게 어필이 되는 하나의 큰 사건이 시대의 흐름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모두가 암직한 내용일 것이다. 안전에 대해서 전년도 연말에 시작된 대형사건으로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었고, 시민들도 안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안전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방관서에서 소방출동로 확보를 위하여 매일 소방차량을 이용한 예방순찰을 하고 있다. 얼마 전 필자가 근무할 때 경험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판단은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00면 00리 마을을 들어선다. 자연부락이기에 도로는 협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선다. 도로 폭은 예상대로 좁았지만, 주정차 된 차량이 없어 승용차보다 상당히 큰 소방펌프차가 쉽게 진행을 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아! 이제는 자연부락에서조차 안전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나 보다.’ 이러한 생각을 단순간에 무너뜨린다. 굽어진 도로에 소형화물차가 한 대 서 있다. 경적(소방 사이렌)을 울렸지만 주택가에 나오는 사람도 없다. 내려서 차량에 가보니 연락처도 없다.

잠시 후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달려온다. ‘아! 차 주인이겠지.’ 그렇지만 와서 대뜸 ‘그렇게 이곳에 차량을 주차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했네’ 하면서 화를 낸다.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차량 문이 잠겨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우리와 힘을 합하여 차를 한쪽으로 밀어서 간신히 소방펌프차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 폭을 확보했다. (우리가 갈 때까지 차주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마을주민 여러 명이 무슨 일로 왔는가 궁금해하여 “화재와 같이 긴급 시에 소방차량이 출동할 수 있는 도로를 확보하는 예방순 찰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공동주택(아파트)이 밀집해 있는 구도심이나 신도심에 예방 순찰을 가도 비슷하다. 도로 폭이 좁아 대형소방차량이 제때 진입을 못 하여 대형화재로 진행되었던 것이 불과 석 달 전인데 벌써 잊었나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꼭 내 집 앞에 주차를 하여야 하는가? 넓은 곳에 주차하고 몇 분 정도 걸어서 이동하면 안 되는가? 모든 관공서에서 나서서 단속하고 과태료 또는 벌금을 부과하여야 하는가? 진정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다.

내 몸에 티끌만 박혀도 아플 것이 당연한데, 이웃의 생명과 직결되는 행동들이 반복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소방차량의 진입이 늦어 구할 수 있는 생명을 구하지 못했을 때 책임을 소방공무원에게 전가하고 말 것인가? 이것은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 회복 불가능한 장애를 입거나 소중한 생명이 사라져 버린 후에는 아무런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 윗글과 비슷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만 바꿔서 연재를 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만이라도, 독자들의 가족만이라도 사소한 행동의 반복으로 위험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는 것이다.

서양인이 운동할 때 입었던 가볍고 부드러웠던 옷이 우리네의 속옷으로 변한 것과 같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모두에게 안전을 생각하게 하였으면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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